우리집에는 별이라는 이름을 가진 토이 푸들이 있었다. 반려견과 함께하는데 부담이 되는 나와 집사람이지만 감수성 강한 초등학교 아들 딸의 정서를 돕기 위하여 고심 끝에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의 우려보다는 별이는 우리집에서 정말 큰 역할을 하였다.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성장을 하면서 가족 간의 대화는 점차 줄어들고 이성적인 대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별이가 매계체가 되어 항상 가족 간의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온가족인 노력한 끝에 기본적인 교육도 잘 되어있었다. 기다려, 악수는 물론이고 배변도 철저하게 화장실에 가서 하는 관계로 대부분의 반려견 가정에 있는 배변 패드는 우리집에는 없었다. 별이는 우리 가족과 16년을 함께한 어느 날 무지개다리를 건너가고 말았다. 별이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가족 간의 대화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집안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그래서 별이의 뒤를 이을 반려견을 함께하는 것도 깊이 고민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16~20년을 별이처럼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나도 곧 은퇴를 하면 여행도하고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집을 비우는 시간이 직장에 억매여 일상적인 출퇴근을 하는 지금을 생활보다는 많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별이의 문제가 매우 고민스러워 새로운 반려견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것은 포기를 하고 반려견에 대한 임시보호의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그래서 종종 아파트 SNS에 긴급히 임시보호자를 구하면 잠시 데리고 와서 지내다 보내곤 했다.
내가 외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가 4년이나된 별이의 이야기를 가지고 왔는가?
요즈음 우리 주위에는 금쪽이들이 너무 많다. 자식을 4~5명을 낳던 우리의 세대에는 형제 간에 아웅다웅하면서 부대끼면서 사회생활을 배우고 성장을 하였다. 그런데 요즈음은 많으면 둘 하나인 가정이 종종있다. 이들은 모두가 금쪽이가 된듯하다. 얼마전 집사람과 유럽 여행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단체로 다녀왔다, 그 중에 금쪽이가 하나 있었다. 언니는 대학생 금쪽이는 중학교 2학년이다. 중학교 2학년인에 매일 엄마 아빠가 오늘은 무슨 옷 입혀라, 썬 블록 발라라, 뭐 먹여라 대학생 언니에게 지시를 한다고 한다. 대학생 언니는 식탁의 반찬 하나 하나 챙겨준다.
남의 집 자녀들이지만 조금은 걱정 스러워 보였다. 집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금쪽이 인데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될까. 금쪽이도 있고 정글속에서 살아남은 사자 새끼 같은 막둥이도 있을 것이다. 과연 저 금쪽이가 그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 남을까? 집에서는 이성적인 판단력을 기르지는 않았는 것 같다, 내 눈에는 이성보다는 본능적인 세계가 그 아이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단체 여행을 하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끼리 식탁을 같이한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드시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통상 연장자가 먼저 수저를 든다. 비록 처음 보는 사람들 끼리도 이것은 우리에게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치레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떤 음식이라도 오면 제일 먼저 자기앞으로 가져간다.
비참한 이야기이지만 집에 키우는 강아지보다도 인내심, 참을성이 없는 귀한 아들 딸로 만들어버렸다. 강아지 훈련을 첫번째가 기다려 훈련이다. 간식을 앞에 놓고 주인이 허락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 간식을 먹을 수 있는 훈련을 통하여 참을성을 길러주는 것이 강아지 훈련을 시작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귀한 자식에게는 이러한 교육도 고리타분한 꼰대의 헛소리로 치부되어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귀한 자식에게 어떤 방법으로 했을까? 그 유명한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나는 어릴 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더라도,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내가 먼저 음식에 손을 대고 먹으면 어머니로부터 혼이 났다. 지금도 기억에 있는 것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빨리 먹고 싶은데 아버지는 마당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마당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진지 잡수러 가자고 조르던 기억이 있다. 아마 아버지가 맛있는 음식을 빨리 드시게 하려고 달려간 것이 아니라 내가 맛있는 음식을 빨리 먹고 싶어서 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참을성과 인내심을 길렀고 이것이 사회에서 남들과 소통하고 함께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런데 소가족과 저 출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자식의 귀한 것만 중요시하다 보니 정작 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갈 것인가에는 관심이 소홀해지면서 오늘의 사태를 만들게 된 원인인 같다. 새삼 온고이 지신이라는 문자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옛 것을 한번이라도 다시 되새겨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