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한 아침, 새로운 하루의 시작
확실히 호텔의 잠자리가 중요한가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두 사람 다 너무나 개운하고 컨디션이 좋았다. 여행에서 숙소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이곳저곳 다니는 것보다 리기 쿨름(Rigi Kulm) 한 곳만 다녀오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앞으로 더 많은 일정이 남아있어 컨디션 조절에 유념하여야겠다.
리기 쿨름으로 가는 산악 기차역은 호텔에서 불과 130미터 떨어진 곳이다. 걸어서 채 2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이런 편리함이 스위스 여행의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스위스의 놀라운 교통 시스템
스위스는 철도와 유람선의 연계가 매우 잘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중요 역이 배의 선착장과 한곳에 있었다. 루체른 시내에서 유람선으로 오는 사람들이 바로 기차로 옮겨 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참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나라는 렌터카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이 적합하도록 시스템이 구축된 것 같다.
오히려 렌터카는 너무 불편하다. 특히 주차 요금이 장난이 아니다. 어제 베른 역 공용 주차장에 약 5시간 주차하고 시내 구경을 했는데 주차 요금이 58스위스프랑이나 나왔다. 우리 돈으로 약 10만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지금 머물고 있는 호텔도 시간당 2프랑에 투숙객은 20% 할인해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의 호텔은 사람과 차량이 같이 숙박하는 개념이 아닌 것 같다. 이들에게 호텔은 사람만 숙박하는 곳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주차는 따로 계산하든지 주차장이 아예 없는 호텔도 많이 있는 것 같다.
다음 목적지 노르웨이도 당연히 렌터카로 이동하며 여행한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캐리어가 너무 크다. 지난해 7월 노르웨이로 가족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확인하니 오슬로를 벗어나면 주차 문제는 심각하지 않다고 했다. 다행이다. 처음부터 오슬로 시내는 렌터카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산악 기차에서 만난 따뜻한 인연
리기 쿨름으로 가는 산악 기차 안에서 부산에서 오신 가족과 마주 앉게 되었다. 어머니, 딸 그리고 외손녀와 함께 여행 중이라고 했다. 삼대가 함께 하는 여행이라니, 참으로 다복한 가정으로 보였다. 자연스럽게 아내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단연 스위스 물가가 화제다. 비싼데 우리 입맛에 잘 맞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리기 산악철도는 1871년에 개통된 유럽 최초의 산악철도 중 하나로, 'Queen of Mountains'라고 불리는 리기산의 정상까지 운행한다. 비텔리나우(Vitznau)에서 출발하여 해발 1,798미터의 리기 쿨름까지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기차는 톱니바퀴 방식으로 운행되며, 최대 경사도가 25%에 달하는 구간도 있다고 한다.
이야기 꽃을 피우는 동안에 기차는 정상 부근의 마지막 역에 도착했다.
알프스의 파노라마와 소들의 합창
수많은 인파가 밀려 나온다. 정상에는 사방으로 호수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루체른 호수를 비롯해 추크 호수, 라우어츠 호수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독일의 흑림(Black Forest)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알프스의 여러 봉우리들이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사면 곳곳에는 소들이 열심히 풀을 뜯고 있다. 스위스의 전통적인 목축 문화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수많은 소의 목에서 흔들리는 방울 소리가 멋진 화음이 되어서 들린다. 이 목에 찬 방울은 '카우벨(Cowbell)'이라고 부르는데, 소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스위스 전통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소들의 배설물 사이로 조심해서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배설물에서 나오는 고약한 냄새도 이곳만의 독특한 경험이다. 소 배설물 냄새를 맡으니 어릴 때 시골에서 살던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의 추억
여름에는 학교에 다녀온 후에 소에게 풀을 먹이러 산으로 갔었다. 온 동네 소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이 참 정겨웠다. 산에서 소들이 풀을 뜯도록 풀어두고 우리는 이런저런 놀이를 했다. 누군가의 이름 모를 조상님의 무덤 앞 잔디밭이 일일 씨름 터가 되었다. 불현듯 어린 시절 한 친구가 소 배설물 위에 넘어져서 온몸에 소똥이 묻어 울면서 집으로 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 추억들이 스위스 알프스의 목가적인 풍경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이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인가 보다.
산 위의 소박한 점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리기산의 풍경과 세계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벌써 2시가 지났다. 정상에는 여러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어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간단하게 소시지와 감자튀김, 맥주 한잔으로 점심을 먹고 내려와 호텔로 돌아왔다. 스위스 전통 소시지인 브라트부르스트(Bratwurst)는 비싸지만 맛은 괜찮았다.
리기산은 마크 트웨인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고 극찬했던 곳이라고 한다. 괴테, 빅토르 위고 등 많은 문호들이 이곳을 찾아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무언가 특별한 영감을 얻었을까.
대금과 함께한 특별한 시간
호텔 옥상에는 루프톱 카페가 있다. 오픈은 저녁에 하지만, 나는 양해를 구하고 오픈하기 전까지 루프톱 카페에서 대금을 불기로 했다.
그런데 대금이 지난 며칠간 불지를 않아서 청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난다. 청을 잘 붙이면 며칠을 불지 않아도 탄성이 유지되는데 나는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해서 며칠만 안 불면 청이 늘어져 지글거리는 불협화음이 난다.
다행히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예비청과 접착제를 가져왔다. 올해 단오 무렵에 채취한 새 청 중에서도 품질 좋은 것으로 두 마디를 준비해 왔었다.
정성껏 청을 붙이고 다 마른 것 같아서 잘 붙었는지 확인하는데 가운데가 터진다. 아뿔싸. 붙여 놓고 보니 청에 은빛이 반짝이는 너무나 좋은 청이었는데 말이다.
다시 잘라서 붙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붙이는 과정에서 또 가운데가 갈라졌다. 이는 내가 잘못 붙인 게 아니고 청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 마디 전체를 못 쓴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청을 접해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다른 마디를 잘라서 붙였다. 다행히 이 마디의 청은 다른 마디처럼 채취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알프스에 울려 퍼진 한국의 가락
올해 채취한 새 청이어서인지 소리가 더욱 청량하고 우렁찼다. 바른 박자의 요들송이 울려 퍼지는 스위스에서 새마치 장단의 아리랑과 상령산 가락이 알프스 산맥에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요들송만 듣던 알프스 산신령님도 오늘만은 귀 기울여 아리랑, 상령산, 한국의 가요들을 즐기실 것이다. 청도 소리가 좋고 컨디션도 좋아서 루프톱 카페에서 오랜만에 마음껏 대금을 불었다. 푸른 호수와 알프스의 산들을 배경으로 말이다.
호텔 직원 몇 명이 올라와서 신기한 듯 들어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동양의 악기 소리에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음악으로 소통하는 순간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은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며 여유를 즐겼다. 때로는 이런 여행도 필요하다. 바쁘게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만이 좋은 여행은 아니니까. 리기산에서 만난 풍경들, 그곳에서 떠오른 어린 시절 추억들, 그리고 알프스에 울려 퍼진 대금 소리까지. 오늘 하루도 소중한 기억들로 채워졌다.
내일은 어떤 새로운 경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