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호수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 루체른에서 오늘 여행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까지의 숨가쁜 일정을 뒤로하고, 오늘은 천천히 이 도시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많은 이들이 또 다른 전망대를 추천했지만, 때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보다 사람들의 삶이 흘러가는 거리 곁에서 느끼는 온기가 더 진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카펠교에서 마주한 시간의 층위들
루체른 시내 관광의 첫 번째 발걸음은 자연스레 카펠교(Kapellbrücke)로 향했다. 1333년에 지어진 이 목조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이 있는 다리 중 하나다. 원래는 도시를 외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요새의 일부였다니, 지금의 평화로운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역사를 품고 있는 셈이다.
다리 위에 서서 바라본 루체른의 풍경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중세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호수를 따라 나란히 서 있고, 그 뒤로는 알프스의 준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파스텔 톤의 건물들이 물에 비친 모습은 마치 인상파 화가의 붓끝에서 태어난 작품 같았다. 관광객들이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아무리 훌륭한 렌즈로도 이 순간의 감동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카펠교의 천장에는 117점의 삼각형 패널화가 그려져 있다. 17세기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스위스와 루체른의 역사를 담고 있어, 걸으며 고개를 들어 하나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안타깝게도 1993년 화재로 많은 그림이 손상되었지만, 복원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역사의 상처마저도 치유하며 전해지는 이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성 레오데가르 성당에서 만난 고요한 아름다움
성 레오데가르 성당(Hofkirche St. Leodegar)은 루체른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건축물이다. 735년에 처음 지어져 여러 차례 화재와 재건을 거쳤고, 현재의 모습은 17세기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이 성당은 바로크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성당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자 경건한 정적이 마음을 감쌌다. 높은 천장과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이곳의 오르간은 스위스에서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6,950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다니 그 규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지역 주민들이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신앙의 공간임을 새삼 깨달았다.
빈사의 사자상, 슬픔이 새겨진 바위
도시 한편의 작은 공원에 자리한 빈사의 사자상(Löwendenkmal)은 루체른에서 가장 감동적인 조각품이다. 1821년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한 이 작품은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튀일리 궁전을 지키다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근위병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사자는 등에 부러진 창이 꽂힌 채 죽어가고 있다. 왜 이들의 희생을 사자의 모습으로 기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표정에서 분노나 절망보다는 숭고한 슬픔이 느껴졌다. 사자는 왕실을 상징하는 백합 문장을 발톱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충성과 희생, 그리고 명예를 상징하는 이 조각품 앞에서 많은 이들이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 조각품을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돌 조각"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앞에 서 있으니 돌 속에서 느껴지는 생명력과 감정의 깊이가 느껴지는 듯 했다.
무제크 성벽에서 만난 중세의 흔적
무제크 성벽(Museggmauer)은 14세기에 건설된 루체른의 고대 성벽이다. 원래 성벽의 절반 정도만 남아있지만, 9개의 망루 중 몇 개는 여전히 올라갈 수 있다. 치트투름(Zyt-Turm) 망루에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가 있는데, 이 시계는 루체른의 모든 시계보다 1분 먼저 시간을 알려준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중세 시대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성벽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루체른 신시가지와 호수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적인 조망을 선사했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이 도시의 면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슈프로이어교의 놀라운 발견
루체른에는 카펠교 외에도 또 다른 고색창연한 다리가 있다. 1408년에 지어진 슈프로이어교(Spreuerbrücke)다. 이 다리의 지붕에는 17세기 화가 카스파 메글링거가 그린 '죽음의 춤' 연작이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데 이 다리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다리 중간중간에 수력 발전 설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안전 문제로 가동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도시 한복판 다리에 발전소가 있었다니! 우리나라의 발전소가 대부분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에 건설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발상이었다.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스위스인들의 실용적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전거 도로에서 배운 다름에 대한 이해
케펜교 근처를 운전을 하고 가는데 특이한 도로 구조를 발견했다. 자동차 도로 가운데에 자전거 전용 도로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양쪽에서는 자동차가, 가운데에서는 자전거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니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좁은 구시가지에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자전거 이용자들의 안전을 고려한 설계였던 것이라고 했다.
이를 보며 내가 가진 생각만으로 세상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각 나라와 도시마다 그들만의 역사와 지리적 조건,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있고, 그에 따라 최선의 해결책도 달라지는 법이다. 여행의 참된 의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청과 구시가지의 일상
루체른 시청(Rathaus Stadt Luzern)은 1606년에 건설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아치형 현관과 프레스코로 장식된 외벽이 인상적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는 시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을 보러 나온 할머니, 점심 식사를 위해 서둘러 걸어가는 직장인들, 광장의 분수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이런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야말로 그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여행자의 실수와 배움
시내 관광을 하면서 내가 스위스 여행 준비가 부족했음을 깊이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주차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렌터카 여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루체른 시내 도로변 코인 주차장은 한 번에 최대 1시간만 예약이 가능했고, 장시간 주차가 가능한 곳을 찾는 것부터가 큰 과제였다.
돌이켜보니 인터라켄 도착 후 렌터카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으로 여행한 뒤, 인터라켄에서 다시 렌터를 한 뒤 루체른에 도착 후 다시 반납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훨씬 편리했을 것이다. 즉 도시 간의 이동은 렌터카를 사용하고 도시에 도착 후에는 렌터카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식을 택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랫다면 편의를 위해 비용을 지불한 자동차가 오히려 큰 짐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도 여행의 일부이고, 다음 여행에서는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 도시에 하루빨리 자율주행 로봇택시가 상용화되어 모든 이들의 주차 고민을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문득 들었다. 기술의 발달이 여행자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편의를 가져다줄 날을 상상해본다.
호수 드라이브로 마무리한 하루
시내 관광을 마친 후, 우리는 루체른 호수의 외곽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겼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면서 호수 위에 황금빛 물결이 일렁였다.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알프스 산맥은 석양에 물들어 더욱 장엄한 모습이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작은 마을들, 호숫가에서 일광욕과 산책 하는 사람들, 요트를 타고 나온 가족들... 이 모든 것이 루체른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소중한 일상이었다. 19일째 여행길에서 만난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하루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루체른의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행은 단순히 명소를 구경하는 것을 넘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와 설렘으로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