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아쉬움, 그리고 두 번째 기회
벌써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여행의 반환점을 돌아선 지금, 지난 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루체른의 호텔에서 짐을 챙기며 아내가 어제 주차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느라 카펠교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마침 카펠교는 제네바로 가는 길목에 있었고, 우리는 자유 여행의 장점을 살려 다시 한 번 들러보기로 했다.
카펠교로 향하는 길,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어제의 아쉬운 일정에 대한 'A/S'가 가능한 것이 자유 여행의 매력이 아닌가. 다시 찾은 카펠교는 어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침 햇살이 레우스강 위에 반짝이며, 교각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서 만난 특별한 풍경
오늘 다시 찾은 카펠교에서 우리는 어제 놓쳤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천천히 다리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역사적인 다리 위에 시계 매장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스위스 여행을 하면서 정말 많은 시계 매장들을 보았다. 인터라켄, 베른, 루체른,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길 곳곳에 시계 매장들이 있었다. 세계 최고의 시계 제조국답게 로렉스, 오메가, 태그호이어 같은 명품 브랜드부터 작은 수제 시계 공방까지 다양한 매장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펠교 위의 시계 매장은 정말 특별했다. 중세의 목조 다리와 현대의 정밀한 시계가 만나는 모습이 묘하게 조화롭기도 하고 대조적이기도 했다. 시간을 담은 건축물 위에서 시간을 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아내는 그 모습을 보며 "스위스답다"고 웃으며 말했다.
시계 매장 안에는 수많은 시계들이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떤 것은 한국 시간을, 어떤 것은 현지 시간을, 또 어떤 것은 뉴욕이나 런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시간 자체를 파는 가게 같았다.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제네바로의 여정 - 예상치 못한 선물
카펠교에서의 아쉬움을 달래고 제네바 호텔로 향했다. 일찍 도착해서 렌터카를 하루 전에 미리 반납하기로 한 것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겪었던 곤란한 경험 때문이었다. 비행기 시간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일로 당황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제네바로 가는 도중, 구글 지도가 새로운 경로를 제안했다. 14분이 단축된다는 안내를 받아들였는데,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예상치 못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이것이 뜻밖의 선물임을 깨달았다.
옥수수밭 사이로 뻗은 좁은 길,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는 산길을 달리며 진정한 스위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규정 속도는 80km였지만 나는 50km도 채 달릴 수 없었다. 마치 고향 마을의 논길을 달리는 듯한,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스위스 농촌의 진짜 모습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광활한 옥수수밭과 스위스 농가들은 그림 같았다. 빨간 지붕을 한 전통 가옥들이 초록 언덕 위에 점점이 자리 잡고 있고,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정갈하게 관리된 포도밭과 작은 교회당의 종탑이 어우러진 풍경은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스위스 농촌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길을 혼자 힘으로 찾을 수 있었을까? 다시금 IT 기술에 대해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국어 음성 지원까지 되는 구글 지도 덕분에 이처럼 편안하게 스위스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조금 왼쪽", "조금 오른쪽" 같은 애매한 표현이나, 원형 로터리에서 직진 쪽 출구를 "다섯 번째 출구"로 안내하는 부분에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동반자였다.
구글에서 한국어를 지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경쟁력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호기심에 구글 제미나이에 문의해 보니, 지구상에 약 7,100개 언어 중 구글 지도가 지원하는 언어는 40여 개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 경쟁력 있는 언어 목록에 한국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러웠다. 구글에서 한국어 음성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나는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을까?
제네바 공항에서의 시련
제네바 호텔에 체크인을 마치고 렌터카 반납을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제네바 공항 프랑스 쪽 렌터카 반납 장소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구글 지도에 나타난 반납 장소는 호텔에서 불과 5km 떨어진 곳인데도 거의 한 시간이 걸렸고, 같은 장소를 세 번이나 지나쳤다. 겨우 도착했는데 인수받을 직원은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호텔 출발부터 렌터카 반납까지 총 두 시간이나 걸린 셈이었다. 아내는 오늘 미리 반납하기로 한 나의 결정을 크게 칭찬했다. 만약 내일 비행기 시간을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겪었던 힘든 경험이 오늘 이런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이 쌓여 다음번에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의 렌터카 반납 결정도 그런 학습의 결과였다.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제네바의 저녁 풍경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스위스, 그리고 새로운 출발
호텔 방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스위스에서 일정을 되돌아보았다. 융프라우요흐의 장엄한 설경, 그린 발도 피에스트의 아름다운 풍경,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베른, 루체른 호수의 고요함…. 각각의 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때로는 힘들었고, 때로는 당황스러웠지만, 그 모든 것이 여행의 일부였다. 완벽한 계획보다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카펠교를 두 번째로 방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여행에서는 언제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내일이면 노르웨이 오슬로로 떠난다. 스위스의 알프스와는 또 다른 북유럽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경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 감사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까지 무사히 여행을 이어올 수 있게 해준 모든 것들에 대해, 그리고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내일은 또 다른 모험이 시작될 것이다. 스위스가 우리에게 선사한 모든 아름다운 기억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설렘을 안고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