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26일차 - 노르웨이 황금 기차길을 따라

by 이 범수


하늘이 선사한 휴식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온다.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만난 비들은 모두 짧은 소나기였는데, 오늘은 그 성격이 다르다.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하루 종일 내린다는 예보다.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 바쁘게 다녔으니, 하늘이 우리 체력 관리를 해주는 것 같아요."

그동안 쌓인 피로가 뼈 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나 보다. 이런 날씨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멈춤도 여행의 일부가 아닐까.

노르웨이 일정의 재정비

아침 식사를 하며 그동안 수집한 정보들을 종합해 노르웨이 전체 일정을 다시 정리했다. 물론 여행이라는 것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큰 틀이라도 잡아두면 우왕좌왕하는 일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노르웨이 같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곳의 자연은 웅대하지만, 그만큼 예측 불가능한 면도 있으니까.

오늘은 숙소를 이동하는 날이다. 11시 전에 방을 비워주어야하니 무작정 쉬지만은 못한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평소보다 늦게 10시쯤 숙소를 나섰다. 비가 내리는 날, 적극적인 야외 활동은 어려울 것 같으니 차 안에서도 충분히 즐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길

그때 떠오른 것이 어제 만난 벨기에 부인이 열정적으로 추천했던 온달스네스에서 돔보스까지의 기찻길이었다. 이 단선 철도는 '골든 트레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론리 플래닛에서 "유럽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여행(Europe's most scenic Journey)"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철로는 많은 구간에서 자동차 도로와 나란히 달린다. 라우마(Rauma) 강과도 여러 구간에서 함께 흐른다. 우리는 자동차로 이 길을 달리면서 중간중간의 명소들을 들러보기로 했다.

자연이 빚어낸 장관

길 양편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엄청나게 웅장한 높은 산들이 우리를 감싸며, 그 산에서 수백 미터나 되는 폭포들이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한두 곳이 아니다. 비가 와서 더 많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는 날 초가집 처마끝에서 물이 떨어지듯 수많은 폭포가 산에서 흘러내린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이 수만 년에 걸쳐 조각해낸 작품이라니. 인간의 어떤 예술품도 이런 웅장함과 숭고함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91년 프랑스에서의 추억

낯선 지역의 편도 1차선 도로,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상황에서 나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네비게이션의 표준 속도는 80km/h를 표시하지만, 나로서는 50~60km 이상 달리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조금만 지나면 뒤에 몇 대의 차량이 따라온다. 그러면 안전지대에서 비켜주고 다시 내 속도로 달렸다.

이 광경을 보던 아내가 말한다. "1991년 프랑스에서 처음 운전하던 때와 똑같네요."

그때가 떠올랐다. 91년 프랑스로 오기 전 나는 면허증만 있었을 뿐 자동차도 없었고 실제 운전 경험은 전무했다. 그런데 프랑스 회사에서 출퇴근용으로 빨간색 푸조 106 소형 승용차를 제공해주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주말, 운전 연습 겸 바람을 쐬려고 외곽으로 나갔다. 그 도로는 편도 1차선이면서 표준속도는 110km/h였는데, 나는 60~70km 정도로 달렸던 것 같다. 잠깐만 달리다 보면 10대 이상의 차량이 뒤에 줄을 서서 오고 있었다 . 우측 공간이 있는 곳으로 비켜서면 모든 차들이 쌩쌩 지나갔지만, 조금 있으면 또 많은 차들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노르웨이의 산길에서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니. 세월은 흘렀지만 어떤 감정과 기억은 그대로구나 싶었다.

라우마 철도의 명소들

Kyllingbrua(닭다리 다리), Slettafossen 폭포, Trollveggen(트롤 벽), Romsdalen Bridge 등 라우마 철도 주변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각각의 장소마다 고유한 이야기와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특히 Kyllingbrua는 1921년에 완공된 아치형 석조 다리로, 높이 76미터의 라우마 강 위에 걸려 있다. 다리 이름이 '닭다리'인 이유는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이 닭다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건설 당시 이 험한 산악 지대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의 끈기와 기술력으로 완성해낸 기적 같은 구조물이다.

Trollveggen은 높이 1,100미터의 수직 암벽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직 벽면 중 하나라고 한다. '트롤의 벽'이라는 이름처럼 노르웨이 전설 속 트롤(거인)들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단다. 실제로 이 거대한 암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신화 속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렌터카 계약의 현실적 고민

오늘 렌터카 계약을 연장하려 했는데, 오슬로 공항에서 반납하려면 이송비 8,000크로네(약 100만원)가 든다고 한다. 베르겐은 같은 지역 구간이라 추가 비용이 없지만, 오슬로는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베르겐에서 반납하고 베르겐에서 파리로 이동해야 했다.

스위스에서의 주차 스트레스 때문에 갈등했던 영향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다. 베르겐-파리 항공편은 노선이 많지 않아 오슬로-파리보다 비쌀 것이다. 여행에서는 이런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완벽한 계획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의 지혜

비가 계속 내리는 하루였지만, 오히려 이런 날씨 덕분에 자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맑은 날의 건조한 산과 폭포도 아름답지만, 비에 젖어 촉촉해진 산과 더욱 웅장해진 폭포들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공항에서 렌터카를 연장하고 새로 계약한 후 일찍 숙소에 들어와 체력을 비축했다. 여행은 마라톤과 같다. 속도보다는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 때로는 쉬어가는 것도 더 오래, 더 깊이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저녁이 되자 비가 그쳤다. 창밖으로 보이는 노르웨이의 산들이 구름에 싸여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내일은 또 어떤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여행의 매력은 바로 이런 기대감과 설렘에 있는 것 같다.

여행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며 생각해본다.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은 일들, 예상치 못했던 비용들, 날씨의 변덕...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91년 프랑스에서의 서툰 운전이 오늘 노르웨이 산길에서의 조심스러운 운전으로 이어지고, 그 추억이 현재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인생도 여행도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일은 어떤 새로운 발견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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