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27일차 -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숨겨진 아

by 이 범수


새벽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니, 몰데의 고요한 수면 위로 페리가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이었다. 내가 그동안 호수라고 생각했던 이 물길이 사실은 바다와 연결된 피오르드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어떻게 이런 거대한 배들이 이 깊숙한 내륙까지 들어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마침내 풀리는 순간이었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드는 빙하가 수백만 년에 걸쳐 깎아낸 자연의 걸작품이다. 빙하기 동안 두꺼운 얼음덩어리가 산을 파고들어 U자형의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빙하가 녹으면서 바닷물이 이곳까지 스며들어 지금의 피오르드가 탄생했다. 그래서 이곳의 물은 짠맛이 나고, 바다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 빚어낸 이 신비로운 수로를 따라 오늘 우리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페리, 움직이는 다리가 되다

한국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편을 생각하며 페리 예약을 걱정했던 나의 우려는 기우였다. 노르웨이의 페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리의 연장선이었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생명줄이자, 주민들의 일상을 지켜주는 든든한 동반자였다. 선착장에 줄을 서면 순서대로 배에 오르고, 도착하면 순서대로 내리는 것. 그 단순함 속에 담긴 노르웨이 사람들의 질서 의식과 배려심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렌터카에 달린 자동 결제 장치를 보며 문득 기술의 발달이 여행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편의를 가져다주는지 새삼 깨달았다. 언어의 벽, 화폐의 복잡함을 뛰어넘어 자연스럽게 현지인처럼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 이런 작은 배려들이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게이랑에르, 천상의 풍경이 펼쳐지다

105킬로미터를 약 3시간에 걸쳐 달린 끝에 마침내 도착한 게이랑에르 전망대. 그토록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 장관이 드디어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때의 그 전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구불구불 흘러가는 모습은 그 어떤 화가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는 자연의 숨결이었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는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노르웨이 5대 피오르드 중 하나다. 길이 15킬로미터, 폭이 좁은 곳은 600미터에 불과한 이 피오르드는 양쪽으로 1,500미터가 넘는 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이곳의 폭포들은 각각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일곱 자매 폭포(De syv søstrene)'는 일곱 개의 물줄기가 나란히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자매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맞은편의 '구혼자 폭포(Friaren)'는 일곱 자매에게 구혼하는 남자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진다.

폭포가 들려주는 자연의 교향곡

선착장 근처의 폭포에서 우리는 한참을 머물렀다. 노르웨이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폭포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추천될 만하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줄기들이 하나로 합쳐져 피오르드로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자연이 연주하는 웅장한 교향곡 같았다. 물이 바위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과 안개는 신비로운 베일처럼 주변을 감싸며, 그 속에서 무지개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기도 했다.

이런 폭포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도시의 소음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자연의 치유제였다.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마치 수천 년 전부터 이곳을 지켜온 자연의 정령들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달스니바 전망대, 구름 위의 세상

달스니바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또 다른 모험이었다. 20킬로미터를 40분에 걸쳐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은 이틀 전 경험했던 트롤스티겐 못지않은 스릴을 선사했다. Z자로 꺾이는 급커브를 돌 때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달라지는 것이 마치 파노라마 영화를 보는 듯했다.

해발 1,476미터의 전망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한참 아래쪽에 만년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8월 중순인데도 이곳의 추위는 한겨울을 연상시켰다. 모든 방문객들이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고도의 차이가 얼마나 극적인 기후 변화를 가져오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아내는 "만약 우리가 이곳을 그냥 지나쳤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구름과 안개가 걷힐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대자연의 웅장함은 추위쯤은 잊게 만드는 감동이었다. 우리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안개가 조금이라도 걷히기를 기다리며 그 순간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썼다. 그 기다림조차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헬레쉴트,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

페리를 타고 피오르드를 가로지르며 게이랑에르를 물 위에서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마치 거인의 나라에 온 난쟁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양쪽으로 치솟은 절벽들이 하늘을 가릴 듯 높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우리의 배는 한 잎의 낙엽처럼 작고 소중했다.

헬레쉴트는 작지만 아름다운 항구 마을이었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폭포가 이 작은 공동체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었다. 많은 집에 붙어 있는 건축 연도 표지판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마을 중앙의 교회에 새겨진 '1859'라는 숫자를 보니, 이곳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1859년은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철종 때이다. 그 먼 옛날부터 이 작은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마을 중앙의 다리는 더욱 놀라웠다. 마차 두 대는 지나갈 수 있지만 자동차 두 대는 교차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이 오래된 다리를, 주민들이 여전히 소중히 여기며 사용하고 있는 모습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

호텔이 2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우리는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었고, 원래 이틀에 걸쳐 볼 계획이었던 모든 곳을 하루 만에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오히려 더 큰 선물을 가져다주는 법이라는 것을, 여행은 늘 이런 식으로 깨우쳐준다.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아침에 나설 때와는 달리 무척 가벼웠다.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그 푸른 물빛과, 달스니바에서 바라본 만년설의 하얀 침묵과, 헬레쉴트의 정겨운 마을 풍경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노르웨이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동시에 그 작은 존재가 이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늘 하루가 주는 감동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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