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28일째를 맞으니 마음가짐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설렘과 흥분은 이제 잔잔한 호수면처럼 고요하게 가라앉고, 대신 이 땅과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른다. 오늘은 그런 마음으로 계획을 새롭게 세웠다. 여행 가이드북에 굵은 글씨로 적혀있는 유명한 곳들 대신, 현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들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호수를 따라 흐르는 시간
호텔에서 나와 감레옐 길(Gamlehjellvegen)로 향하는 길은 혼인달스바트네트
(Hornindalsvatnet) 호수를 따라가는 길이었다. 이 호수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 알려져 있는데, 최대 깊이가 514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빙하기 때 거대한 빙하가 파낸 자국이 지금의 호수가 되었다니, 자연의 조각칼이 얼마나 거대하고 정교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호수 주변 곳곳에 자리한 야영장들은 노르웨이 사람들의 자연 사랑을 보여주는 작은 증거들이었다. 우리가 잠시 쉬어간 곳에서도 그런 따뜻한 만남이 있었다. 캠핑카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폴란드 여성은 낯선 우리에게 주저 없이 커피 한 잔을 건넸다. 그 커피 한 모금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동질감이 녹아있었다. 캠핑카 렌터 비용이 알아보니 "캠핑카 렌털비가 10일에 2천만원 정도예요." 그녀의 남편이 맥주 거품을 입술에 묻힌 채 대답했을 때,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행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누군가에게는 캠핑카가 최고의 자유이고, 누군가에게는 호텔 침대의 포근함이 더 소중할 테니까.
풀이 자라는 지붕 아래
감레옐 길(Gamlehjellvegen)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마을 전체가 토르프(turf roof) - 흙과 자작나무 껍질, 그리고 풀로 덮인 전통 지붕 - 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지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노르웨이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토르프 지붕의 역사는 바이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단다. 자작나무 껍질이 방수층 역할을 하고, 그 위의 흙과 풀이 단열재가 되어 집 안을 따뜻하게 지켜준다고 한다. 여름에는 지붕의 풀들이 산소를 만들어내고, 비를 흡수해 홍수를 막아주기도 한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초록색 지붕들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친환경 건축의 걸작품인 셈이다.
마을은 조용했지만 생기가 넘쳤다. 여러 등산로의 입구가 되는 곳이라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한 젊은 엄마의 모습이었다.
작은 영웅들의 모험
네 살, 두 살 정도로 보이는 두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그 유모차를 자전거에 연결한 채 산으로 향하는 엄마.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다.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하이킹을 하시나요?" 우리의 질문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도 이미 제자리에 앉아 모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노르웨이에서는 '프릴루프슬리브(friluftsliv)'라는 개념이 있다고 했다. '야외 생활'이라는 뜻으로,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단순한 여가가 아닌 삶의 철학으로 여긴 단다.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자연과 함께 자라며, 산과 숲을 놀이터로 삼는다. 이 엄마와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런 노르웨이 문화의 진수를 엿볼 수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는 우리의 부탁에 그녀는 정중히 거절했지만, 뒷모습 정도는 괜찮다며 배려해 주었다. 그 순간 국적을 떠나 모든 엄마가 가진 위대함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거울 같은 호수와 구름의 허리띠
다음 목적지인 비데포센(Videfossen) 폭포로 가는 길은 옵스트뤼스바튼(Oppstrynsvatnet) 호수를 끼고 이어졌다. 이 호수는 빙하가 녹은 물이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물빛이 유독 맑고 푸르다. 호수면에 비친 건너편 언덕의 집들과 하늘의 구름들이 마치 두 개의 세상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 같았다.
높은 산봉우리들을 구름이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들이 호수를 내려다보며 수천 년간 이 풍경을 지켜온 파수꾼 같았다. 우리는 몇 번이나 차를 세우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사진을 몇장 찍기도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풍경은 렌즈로는 담을 수 없다. 바람의 냄새, 물결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 구름이 산을 타고 흘러가는 움직임까지... 오감으로 느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작품이었다.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줄기
드디어 비데포센 폭포에 도착했다. 이 폭포는 높이가 약 73미터로, 란달렌(Randalen) 계곡에서 가장 인상적인 자연 경관 중 하나란다. 폭포의 이름 'Videfossen'은 '넓은 폭포'라는 뜻으로, 실제로 물줄기가 바위면을 타고 넓게 퍼지며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폭포 앞에 서니 물소리가 천둥처럼 귀를 때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물의 양이 저 높은 곳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물방울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폭포의 물은 고원지대의 만년설과 빙하에서 시작된다. 봄과 여름에 눈이 녹으면서 물의 양이 최고조에 달하는데, 우리가 방문한 지금이 바로 그 시기였다. 험준한 산길을 올라온 보람이 충분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폭포를 지나 산 정상까지 올라가니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저 거대한 폭포의 발원지였다. 고요한 호수면을 바라보니, 이 잔잔한 물이 저 아래에서는 그렇게 역동적인 생명력을 뿜어낸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소박한 발견의 기쁨
돌아오는 길에 들른 뢰엔(Loen) 호수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이곳은 뢰엔 스카이리프트(Loen Skylift)로 유명한 곳이다. 이 케이블카는 해수면에서 해발 1,011미터의 호벤(Hoven) 정상까지 단숨에 올려주는데, 2017년 개장 이후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케이블카 대신 호수 주변을 걸으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로 했다. 28일간의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때로는 가장 단순한 것들이 가장 깊은 감동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좋지만,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자연과 눈높이를 맞추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진짜 맛집의 정의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며 호텔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오늘 방문한 곳들은 어떤 유명 관광지보다 '맛있고 가성비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맛'이란 단순히 미각적 만족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함께 느끼는 깊은 만족감을 의미한다.
유명한 맛집에 줄을 서서 먹는 음식도 좋지만, 때로는 동네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끓여주는 국수 한 그릇이 더 깊은 감동을 주는 법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가이드북에 별표가 쳐진 곳들도 좋지만, 현지인들의 발길이 머무는 소박한 장소들에서 발견하는 진짜 아름다움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폴란드에서 온 여성이 건네준 따뜻한 커피, 두 아이를 데리고 모험을 떠나는 용감한 엄마, 구름의 허리띠를 두른 산들,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 이 모든 것들이 오늘 우리가 발견한 진짜 맛집의 메뉴들이었다.
28일째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진정한 여행의 의미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작은 것에서도 감동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다면, 어디서든 특별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오늘도 그런 하루였다. 내일은 또 어떤 숨겨진 보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