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생 범수가 89년생 범수에게 하는 당부의 말
베르겐의 아침 공기가 아직 코끝에 남아있는데, 벌써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의 대합실에 앉아 있다. 잠시 후면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맡길 것이다. 41일간의 긴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허전하면서도, 동시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가슴 깊숙이 자리 잡는 것을 느낀다.
파리. 참 오랜만이었다. 출장으로 그렇게 많이 드나들었던 이 도시를, 이제 언제 다시 밟을 수 있을지 모른다. 섬나라는 아니지만 어느새 섬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서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국경을 넘어본 적 없었던 내게, 처음으로 넓은 세상을 보여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너, 89년생 범수가 태어난 그해 5월, 나는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밟았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인천공항도 없던 시절,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앵커리지를 거쳐서 프랑크푸르트를 돌아온 끝에 도착한 파리는 내게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1989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5,418달러일 때, 프랑스는 이미 33,320달러를 기록하고 있었다. 숫자로만 봐도 6배가 넘는 차이였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그 차이는 숫자 이상이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앞선 것이 많았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파리에서 아미앙으로 가는 A1 고속도로의 무인 결제 시스템이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100% 여사님들이 톨게이트에 앉아서 유인 결제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카드 하나만 갖다 대면 톨게이트가 열리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하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모든 것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공장에서도, 거리에서도 나는 그들의 선진화된 기술과 문화를 배우기에 바빴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91년 프로젝트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아미앙에 와서 1주일간의 호텔 생활을 마치고 우리가 거주할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였다. 생활필수품을 사러 마무드(프랑스의 대형 할인점)에 갔는데, 전자제품 매장 가장 구석진 곳에 삼성과 LG 텔레비전이 20몇 인치짜리 딱 한 대씩 하얀 먼지에 싸여 숨어 있는 것을 봤다. 그 순간 가슴이 미어져 왔다. 자존심이 상했고, 동시에 분함이 치밀어 올랐다. '언젠가는 우리 제품이 이 매장의 정중앙을 차지하는 날이 올 거야.'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후 2003년 평화발레오를 떠날 때까지 1년에 한두 번씩은 업무차 프랑스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온 프랑스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참 많은 것이 달라져 있더구나.
우리나라의 2024년 1인당 국민소득은 36,745달러, 프랑스의 2023년 1인당 GDP는 39,117달러라고 한다. 지난 35년 동안 우리가 얼마나 급속하게 성장했는지 숫자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숫자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여행 내내 거리 곳곳에서 그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우리의 소득 수준은 6% 정도의 차이 인데 내가 느낀 물가의 수준은 60% 이상이 나는 것 같다. 정말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00ml 생수 한 병이 인천공항 슈퍼는 1,100원인데 드골공항 자판기는 2.4유로이더군. 그런데 너는 아직도 헬 조선이라고 하지 않느냐?
예전에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아직도 저렇게 하고 있나?' 하는 것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아미앙에 갈 때 사용한 렌터카가 프랑스의 유명한 P사 계열 C사 차량이었는데, 첫인상이 한마디로 '차를 왜 이렇게 밖에 못 만드나?' 였다. 승차감도, 편의장치도, 모든 면에서 한국에서 타던 차와는 많은 차이가 났다.
내가 처음 프랑스 출장을 왔을 때, 프랑스의 P사와 R사 자동차 그리고 독일의 M사 B사의 자동차는 우리나라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타던 유명 외제 차였다. 그때 우리나라의 한 자동차 회사는 공장에 'Global Top 10'이라는 대형 광고판을 걸어놓고 직원들의 분발을 독려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프랑스 P사와 R사의 이름은 이제 듣기 힘든 잊혀진 멜로디가 되어가고 있고, 그때의 그 한국 자동차 회사는 Global Top 3 혹은 Top 5로 회자되고 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다. "경제를 발전시켜서 선진국이 되자"는 말을. 그때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되면 선진국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1만 달러를 넘어섰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선진국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했다. 어느 교수님 말씀으로는, 선진국이 되려면 경제적으로 부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문화가 있어야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하셨다. 중동의 어떤 산유국이 국민소득 4만, 6만 달러가 되어도 선진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부재 때문이라고.
그런데 우리에게는 문화가 있지 않은가? 5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우리만의 유교 문화가 있고, 현대에 와서는 드라마, K-pop, 영화 등 K-Culture가 전 세계를 주름잡고 있지 않은가?
내가 선진국의 정의를 내릴 만큼 그 분야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평소 생각해 왔고 이번 여행에서 더욱 강하게 느낀 것은, 이제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범수야. 한 가지 큰 의문이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인 너희들이 과연 선진국 국민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을까?
나는 40년 직장생활 중 30년 이상을 프랑스, 미국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그들은 인간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만한 인격을 갖고 있었다. 물론 내 경험의 표본이 많지는 않고, 그들 중에도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선진국 국민으로 존경을 받으려면 이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네가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덕목을 갖춘 대한민국의 주인인가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경제적, 기술적인 것은 이미 우리도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비행기가 착륙해서 탑승교가 연결되지도 않았는데 맨 뒷좌석 사람까지 일어서서 기다리는 그런 조급함을 버리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 2차 세계대전 후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도록 노력했던 선배들의 노고에 조금이나마 감사하며 살자. 나는 내가 회사 생활을 하는 40년 동안 기획하고 실행했던 일 중에서 97% 이상이 실패이거나 성공을 위한 시행착오였고 미흡하나마 성공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겨우 3%가 안 된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 3%가 모여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눈에는 97%가 먼저 보이겠지. 그리고 그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이젠 3%를 보려고 노력도 하자.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겸손한 태도로 기다려줄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자. 법과 정의가 있고 이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세상을 만들자. 양비론으로 논쟁하지 말고, 녹색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빨리 가라고 경적을 누르는 조급함 없이, 나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적인 기준 없이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유명 관광지마다 인증 사진을 찍는 장소가 있었다. 때로는 줄의 길이가 20미터는 되는 곳도 많았다. 그런데 거기서 10분씩, 15분씩 세상 모델의 모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그 나라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둘 사람은 한국인 이더라.
노르웨이 오다의 한 호텔에 체크인할 때였다. 직원이 커피와 차는 1층 식당에서 마음껏 드시라고 했다. 화장실도 철저히 돈을 받는 나라에서 인심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니 헤어드라이어와 커피포트가 없었다. 프런트로 내려가서 왜 없느냐고 물으니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필요하다고 하니 내주면서 하는 말이, "방에 두면 훔쳐 가서 필요한 사람에게만 이렇게 준다"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어떤 나라 사람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 나라는 경제적으로 아무리 부강해져도,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선진국으로 존경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수야, 부디 너희가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서 명실상부한 선진국 국민으로 존경받는 대한민국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경제 지표와 기술력만으로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인품이고, 나라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도 결국 그 나라 국민 한 사람인 너의 인격이다.
지금 인천행 비행기 탑승 안내 방송이 들린다. 41일간의 긴 여행이 끝나간다. 하지만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네가 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후손들이 걸어가야 할 진정한 선진국으로의 여행 말이다. 그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60년을 넘어 살아온 선배가 30대의 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파리의 저녁노을이 창밖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인천공항에는 귀여운 이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