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40일 차 - 노르웨이에서의 마지막 밤

by 이 범수


비 내리는 아침, 감사한 마음으로

창문을 열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진한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문득 오늘 트롤퉁가(Trolltunga)를 향해 떠날 다른 여행자들이 떠올랐다. 그 험난한 산길을 걸어야 하는 이들에게 이 비는 적지 않은 시련이 될 터였다. 우리는 다행히 오늘 베르겐(Bergen)으로 향해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 근처 호텔에서 노르웨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면 되는 일정이었다.

지난 40일을 돌이켜보니 정말 날씨의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 때문에 계획을 바꿔야 했던 날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끝없이 길게만 느껴졌던 이 여정이 어느새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그동안 수많은 해외 출장과 패키지여행을 다녔지만, 이번처럼 세세한 계획 없이 긴 시간을 여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부턴가 E티켓도 출력하지 않고 여권 하나만 들고 공항에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이렇게 자유롭게 흘러가는 여행은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다. '내가 너무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마지막 날을 맞이하니 묘한 성취감이 밀려온다.

폭포와 터널, 자연과 인간의 조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호텔을 나섰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베르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가는 길에 우리는 또 하나의 장관을 만났다. 바로 푸레베르그스포센(Furebergsfossen) 폭포였다.

이 폭포는 높은 절벽에서 거침없이 떨어지는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빛 실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잠시 그 장관을 감상했다. 비에 젖은 바위틈새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베르겐으로 향하는 길에서 아내가 터널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베르겐 공항까지 단 135km의 거리를 가면서 우리는 페리를 한번 이용하고 크고 작은 터널 25개를 통과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피오르드와 산맥이라는 자연의 장벽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를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많은 터널들을 노르웨이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건설했고 그것이 또한 그들의 삶을 이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저 지나가는 길이 아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애증의 동반자와의 이별

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반납하는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 지난 16일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이 차는 참으로 애증이 깃든 존재였다. 유럽의 좁은 도로와 복잡한 주차 상황,그리고 좁은 산악도로에서 맞은편 차와 비껴가야 할때의 아슬아슬함은 운전에 익숙한 나에게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었다. 특히 베르겐 같은 도시에서는 주차 공간을 찾느라 몇 바퀴씩 돌아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차가 있었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노르웨이의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었다.

렌터카 키를 반납하고 느꼈던 홀가분함은 단순히 운전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만이 아니었다. 이제 정말로 여행이 끝나간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샴페인 한 잔에 담은 40일의 추억

베르겐 공항에서 차를 반납하고 노르웨이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서 아내와 함께 샴페인 한 잔으로 40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친것에 대한 자축을 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아내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다 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일은 단 한 번도 서로에게 화를 내거나 언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40일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의견이 다를 때도 있었고,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했다. 아내는 늘 나의 결정을 믿고 따라주었고, 나 역시 아내의 의견에 귀 기울이려 노력했다.

특히 우리가 지킨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되돌아보지 않고, 항상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아까, 그때 왜 그랬느냐' 식의 후회나 원망 대신, '내일은 어디로 가볼까', '다음에는 어떻게 해볼까' 같은 미래 지향적 대화만 나눴다. 이것이 우리 부부가 40일 동안 화목하게 여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행이 가르쳐준 것들

이번 여행을 통해 예상치 못한 성장도 있었다. 구글 지도를 능숙하게 활용하게 되었고, 각종 앱을 이용해 숙소를 예약하고 교통편을 찾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누르는 것이 어색했는데,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정보를 찾고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매일 여행 후기를 작성해 SNS에 공유하기로 한 결정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처음에는 '내 근황을 SNS에 올리는 게 적절할까?', '끝까지 꾸준히 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더 자세히 보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스쳐 지나갔을 풍경도 카메라에 담고, 그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번역기와 인터넷을 활용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덕분에 여행의 깊이가 한층 더해졌고, 40일간의 기록이 생생하게 남게 되었다. 몇 년 후에 이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지금 이 순간의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날 것이다.

다음 여행을 위한 다짐

하지만 반성할 점도 적지 않다. 먼저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잊어버리지만 말자'는 소극적 자세였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실력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단순한 대화를 넘어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전시물에 대한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면 여행이 더욱 풍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보통신 기술 활용 능력도 더 키워야 할 부분이다. 기본적인 것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다음 여행에서는 좀 더 다양한 앱과 서비스를 활용해보고 싶다.

또한 다음 여행 때는 사전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자유여행의 매력은 계획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나는 것과는 다르다. 여행사의 컨설팅을 받거나 좀 더 구체적인 자료 수집을 통해 여행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을 떠날 때와 돌아갈 때의 계절 변화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을 떠날 때는 한여름이었는데,프랑스,스위스를 거쳐 노르웨이에 오니 이미 한국의 가을 날씨였다. 현지의 기후 변화도 더 꼼꼼히 체크했어야 했다.

대금(大笒) 연주에 대한 새로운 각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 중 하나는 대금 연주였다. 우리나라 전통 악기인 대금을 가져와 유럽의 도시와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연주해보고 싶었던 로맨틱한 꿈이 있었다. 10곡정도를 준비해 왔지만 실제로 제대로 연주한 곡은 다섯곡 정도에 불과했고, 억지로라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만한 수준의 연주 영상은 두세 곡 정도 밖에 남기지 못했다. 이역만리까지 가져왔으면서도 제대로 대금의 아름다움을 선보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앞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많이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혼자만의 연습으로는 한계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주하고,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악보도 완전히 외워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또한 나의 실력을 향상시켜서 어디에서도 손색이 없는 대금 연주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대금이 낭만적인 도구로서만 머물러 대금을 욕보이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아름다운 악기가 가진 진정한 매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어야 겠다.

마지막 밤의 감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졌다. 창밖으로 베르겐 공항 근처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 모든 것과 작별하고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40일 전 인천공항에서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출발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밤을 맞이하고 있다니. 시간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 40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했던 시간 중 하나였다.

내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사랑스러운 외손녀와의 재회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40일 동안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다려준 손녀에게 유럽에서 준비한 선물을 빨리 주고 싶다.

노르웨이에서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조용히 저물어간다. 창밖의 별들이 우리의 무사 귀국을 축복해 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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