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시작
오늘은 여행 계획에서 '예비 일'로 남겨둔 날이었다. 긴 여행의 막바지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여유로운 하루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침을 천천히 먹으며 호텔 직원에게 근처 볼거리를 물어보니, 멀지 않은 곳에 빙하가 있다며 부아르브렌(Buarbreen)을 추천해주었다. 또 다른 숨은 보석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안경이 보이지 않았다.
캐리어 가방, 침대, 화장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을 몇 번씩 뒤져도 안경은 온데간데 없었다. 오늘 한 일이라고는 아침 식사, 프런트에서 일정 상담, 그리고 샤워가 전부였는데 말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식당과 프런트까지 다녀왔고, 메고 다니는 백팩은 열 번도 넘게 뒤졌다. 캐리어의 모든 짐을 꺼내서 다시 넣기를 반복하며 30분 이상을 허송세월했다.
안경 없이는 운전이 걱정되었다. 아내와 함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샅샅이 뒤진 후, 결국 호텔 청소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분은 우리가 이미 몇 번씩 확인한 곳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더니, 책상 뒤 난방용 라디에이터를 확인했다. 그곳에 안경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아둔 것이 떨어지면서 라디에이터 틈에 끼인 것이었다. 마치 세상을 다시 얻은 기분이었다.
부아르브렌으로의 여정
감사 인사를 전하고 우리는 부아르브렌을 향해 떠났다. 이 빙하는 노르웨이 서부 요스테달스브렌(Jostedalsbreen) 국립공원의 일부로, 유럽 본토에서 가장 큰 빙하군인 요스테달스브렌의 지류 중 하나라고 한다. 수천 년 동안 형성된 이 빙하들은 노르웨이의 장엄한 자연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고 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을 시작했는데, 주차장 옆 강에는 빙하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양의 물이 거센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소리만으로도 저 위에 펼쳐진 얼음 세계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수태골에서 팔공산 동봉으로 올라가는 길처럼 흙을 밟고 나무 숲 사이를 걸었다. 친숙한 한국의 산길 같았다. 그러나 조금 올라가니 관악산의 바위 구간처럼 암반과 바위 사이를 오르내려야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별다른 준비 없이 시작했던 산행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부러진 나뭇가지로 급작스레 스틱을 만들어서 올라갔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여기는 노르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듯 길은 가파르고 험해졌다.
자연의 교향곡
산 중턱에 올라서니 여기저기서 여러 갈래의 큰 폭포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었다. 저 엄청난 양의 물이 모두 빙하가 녹아서 흐르는 것이라니, 자연의 순환이 만들어내는 장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는 더욱 가팔라져서 설치되어 있는 밧줄과 체인을 붙잡고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두 시간여의 산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불과 100미터도 안 되는 전방에 거대한 빙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빙하 바로 아래로는 작은 개울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그 아래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폭포의 장관을 보니 저 위에 보이지 않는 빙하의 규모가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빙하 동굴 탐험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가까이서 이토록 어마어마한 규모의 빙하를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는 빙하가 녹은 물이 여러 갈래로 폭포가 되어 세차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노르웨이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폭포에도 뒤지지 않을 장관이었다.
겸허한 깨달음
수십만 년, 어쩌면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 만들어낸 얼음덩어리를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런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빙하는 지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타임캡슐 같았다. 매년 조금씩 쌓인 눈이 압축되어 만들어진 이 얼음 속에는 수천 년 전의 공기와 먼지, 화산재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빙하 코어를 연구해 과거의 기후를 알아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곳 부아르브렌은 약 1,200년 전 바이킹 시대부터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로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존재다. 중세 시대에는 빙하 위를 지나는 교통로로도 활용되었다고 하니,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만족스러운 마무리
짧지만 지금까지 했던 트래킹 코스 중 강도는 가장 높았던 오늘의 산행이었다. 조금은 덜 알려진 곳이라 큰 기대는 없었는데, 정말 멋진 풍광을 눈과 마음에 고스란히 담고 왔다. 가볍게 시작한 오늘의 산행은 그 어떤 산행 못지않게 알차고 여운이 남는 시간이 되었다.
걱정했던 노르웨이 3대 트래킹을 무사히 완주하고, 오늘 덤으로 그에 못지않는 멋진 빙하까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이번 여행이 정말 성공적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긴 시간의 일정이 차질 없이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내일은 베르겐으로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이번 여행의 대단원을 마무리해야 한다. 39일간의 여정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오늘 만난 빙하의 장관은 오래도록 가슴 깊이 남을 것 같다.
아침에 잃어버린 안경을 찾으며 시작된 하루가 이토록 값진 경험으로 마무리되다니, 여행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계획에 없던 발견들, 예상치 못한 감동들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