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것만이 최선의 행복인가: 3만 5천 불 시대,

by 이 범수

1. 가난의 기억이 남긴 훈장, 일이라는 종교

5개년 계획의 깃발이 나부끼던 시절, 우리의 청춘은 국가의 성장과 궤를 같이했다. 절대 빈곤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해 우리 세대가 품었던 단 하나의 종교는 바로 ‘성실한 노동’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불이라는 아득한 고지를 향해 내달리며, 우리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축복은 땀 흘려 일하는 즐거움이라 굳게 믿었다.

그 맹목적인 믿음은 퇴직을 앞둔 시점까지도 내 삶을 강박처럼 옭아매었다. 평생토록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아침에 눈을 떠서 출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두려움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질 그 많은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소비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결국 나는 퇴직 후에도 기어코 할 일을 찾아 나섰고, 다행히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사회에 환원할 기회를 얻어 다시금 치열한 현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책 밖으로 나와 현장에서 답을 찾고자 했던 지난날의 열정 그대로,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생산하고 기여해야만 나의 존재 가치가 증명된다고 믿었다.

2. 병상에서 마주한 낯선 천장, 그리고 멈춤

그러나 삶은 때때로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브레이크를 건다. 뜻하지 않은 사고와 수술로 인해 나는 꼬박 두 달을 병상에 누워 지내야만 했다. 내 힘으로 온전히 일어서지도 못한 채 병실의 하얀 천장만을 바라보던 그 무력한 시간 속에서,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서늘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이것은 아니구나.’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억지로 일거리를 만들어가며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온전한 삶일까. 그것은 어쩌면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던 과거의 관성이 만들어낸 쓸쓸한 잔영일지도 몰랐다. 육체의 한계를 절감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을 용기를 얻었다. 모든 스트레스와 단절하고, 오직 내 마음이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일들만 곁에 두기로 결심한 것이다.

3. 비워낸 자리에 채워진 온전한 나의 시간

강박적인 노동을 덜어낸 자리에는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잔잔한 기쁨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강연과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결이 맞는 사람들과 사교적인 모임을 가지며 소소한 웃음을 나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다는 나만의 확고한 원칙이 생겼다. 모임에 참석하되 결코 운영진을 맡거나 앞장서서 책임을 짊어지지는 않는다. 다소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그저 평범한 참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모임의 분위기에 스며들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깊은 호흡으로 대금을 불며 우리 가락의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기대거나, 고요히 앉아 참선을 하며 복잡한 세속의 번뇌를 비워내는 시간들은 그 어떤 경제적 보상보다도 내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어 준다.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로 평화로운 시간. 그것은 노동의 밖에서 비로소 발견한 진정한 ‘나’의 모습이었다.

4. 3만 5천 불 시대, 품격 있는 노년을 묻다

간혹 동년배의 지인들이나 선배들을 만날 때면,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현업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는 운이 좋아 아직도 현직에 있다"며 자랑스레 자신을 소개한다. 유튜브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들 역시 60대 이후의 가장 큰 축복은 여전히 출근할 직장이 있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면 진심을 담아 따뜻한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나 역시 행복해지기 위해 다시 이력서를 쓰고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하는가?’

나의 대답은 단호하다. 절대 그럴 생각은 없다. 물론 내가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금전적인 보상이나 쉼 없는 노동만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낡은 명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국민소득 3만 5천 불을 웃도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제적인 잣대로만 본다면 남부럽지 않은 선진국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내면과 문화도 그에 걸맞게 성숙해야 하지 않을까. 선진국 국민의 교양과 인격이란, 무조건 몸을 혹사하며 돈을 버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관조할 줄 알고, 타인과 부드럽게 연대하며, 예술과 철학을 향유하고 쉼의 가치를 아는 데서 비로소 품격이 피어난다.

늙어서 체력적으로 감당이 안 될 때까지 억지로 육체를 갉아 먹으며 일하는 것만이 정녕 행복인가. 일 이외의 삶, 노동의 계산서 밖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의 풍경이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배고픔의 공포에서 벗어나, 고요히 자기 내면을 가꾸고 진정한 삶의 여백을 즐길 권리가 있다. 이것이 3만 5천 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할, 선진국 국민으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권리이자 참된 행복일 것이다.

나는 외국계 기업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관계로 프랑스, 미국의 동료들이 많이 있다. 이들과 한국의 동료들과 퇴직 후를 대하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내 눈에 제일 뚜렷하게 다른 것이 많은 외국인 친구는 가능하면 일찍 퇴직하고 퇴직 후에 인생을 어떻게 즐길까를 고민하고 많은 한국인 친구는 어떻게 하면 한해라도 더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을 논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차이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진정한 선진국을 묻다: 풍요의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