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방황을 끝내고 안정된 마음이 필요했다. 밤새 고민하여 사직서를 썼다 찢었다를 반복하다가 한숨도 못 자고 아침을 맞았다. 새 아침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때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한 줄로 된 사직서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는데 몸이 무거웠다. 사직서가 내 심장을 두드리며 '사직은 안돼.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고 말하며 당장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려는 것 같았다.
나도 안간힘을 썼다.
'아니야. 지금 아니면 안 돼. 그동안 얼마나 고민하고 내린 결론인데'
심호흡을 하며 흔들리지 않기로 다시 한번 전의를 불태웠다.
지하철 안은 부산했다. 예전의 나처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신문을 팔고 있는 청년을 보고 1,000원을 건네며 신문 한부룰 샀다. '고맙습니다'라며 웃어 보이는 모습이 선해 보였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나처럼 사직서를 품에 안고 있는 출근하는 사람이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봤다.
'있을 수도 있겠지. 나만 힘들어하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겠지. 회사를 그만두는 사직서는 아니더라도 마음속에 그 무엇인가에 대한 사직서는 하나씩 있을 거야. 그것이 직장이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든, 가정이든, 하여튼 뭐든, 사직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인 거야'라고 나를 위로했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멀뚱멀뚱거렸다. 사직서를 몇 번이나 만지작 거렸는지 아침에 나를 만류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맛있던 점심시간이 낯설고도 새롭게 느껴졌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 담당 대리님께 조용히 사정을 이야기하고 사직서를 내밀었다. 대리님은 당황한 듯 아니면 화가 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동료들이 정신없이 마감을 하는 동안 나와 대리님 사이에만 이상한 공기가 맴돌았다.
출납을 다른 직원에게 부탁하고 퇴근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대리님은 술한자 하자며 내 손을 잡았다. 마지막 술잔이라고 생각하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나를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고 도와주셨던 대리님이셨다. 늘 가던 삼겹살집으로 갔다. 불판에 오른 삼겹살이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이글거렸다. 삼겹살이 다 익기도 전에 소주를 연거푸 세잔 들이켰다. 대리님도 마찬가지였다.
취기가 오르자 대리님의 심오한(?) 인생사가 안주로 더해졌다.
"JO계장, 너 진짜 그만두고 싶냐. 어떻게 들어온 은행인데, 진짜 목표가 있어 그렇다면 막지는 않겠다만. 그런데 이 말만은 해주고 싶다."
대리님의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잔뜩 취한 채로 대리님으로부터 사직서를 돌려받고 있었다. 내일부터 더 열심히 근무하겠다는 말까지 하고.
사직서를 돌려받고 며칠이 지났다. 먼 훗날 은행장이 된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출납 업무 특성상 매일 밤 11시가 되어서야 은행문을 나서는 일이 계속되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새로운 전산시스템 변경을 위한 시범작업을 하느라 출근이 이어졌다. 꼬깃해진 대학진학에 대한 열망이 마음 한편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음을 다 잡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주 멍하니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너무나 열심이었다. 정성껏 고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만 이렇게 하루종일 사직을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사직서를 다시 꺼내 보았다. 며칠이 지나 다시 사직서를 제출했고 대리님도 나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그래 JO계장, 그동안 수고 많았어. 어딜 가든 잘할 거야. 항상 응원하마, 연락 자주 하고."
대리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점장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직원들과도 작별인사를 나눴다.
1994. 1. 22. '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인사드리러 오겠다’며 약속하고 직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은행문을 나섰다. 시원섭섭했다. 회갑 때 그렇게 침이 마르시게 자랑을 하셨던 아버지, 늘 묵묵히 지켜보며 힘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 모르게 사표를 던졌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다짐한 대로 곧바로 이발소로 가 삭발을 했다. 이발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첫 손님인 듯 아저씨는 공손하게 나를 맞았다.
"빡빡 밀어주세요"
"빡빡?"
"예"
"아니 젊은 양반이 늦게 군대 가는가?"
"예. 내일 입대해야 해서요"라고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이발기가 머리 위로 막 들이밀어지는 순간 '잠깐만요'를 외쳤다. 마음속으로. 아저씨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단번에 뒷목에서부터 이마 중앙에 이르기까지 고속도로처럼 길을 냈다. 아저씨와 나는 서로 다른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툭, 툭' 한 움큼씩 과거의 나 자신이 직선으로 발 앞에 내동댕이처는 것 같았다. 침착하려고 했지만 거울 속의 나는 많이 슬퍼 보였다.
"다 됐어. 이렇게 매끈한 두상은 첨 봤네.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아, 오늘 처음 보셨겠지요, 첫 손님이니까"
아저씨의 느닷없는 한 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다. 왼손, 오른손으로 번갈아가며 대단한(?) 머리를 만져보았다. 따뜻함과 선선한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직과 삭발은 어둡고, 자신 없었던 내 과거와의 이별의식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나와 헤어질 결심을 실행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의식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진행자도 나도 만족했다. 리허설도 없이 순식간에 성공적으로 의식이 마무리되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결코 리허설은 없다. 매 순간, 매일이 어떤 모습이든지 나를 결정할 것이다.
모자를 눌러쓴 채 독서실로 향했다. 비록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달려가기로 다시 한번 굳게 마음먹었다.
두려운 것은 느림이 아닌 멈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