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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Aug 22. 2023

11 일억원이 사라졌다

은행생활이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은행에 크게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 회갑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택한 직장이었다고 생각하니 쉽게 정이 들지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했겠지만. 마음 한편에 여전히 상고를 잘못 선택해서 주산, 부기 2급 자격증 취득에 3년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고등학교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 주도적인 삶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계속 조종당하는 것만 같았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늘 현명한 선택을 해야겠다고 마음에 새기고 다짐을 해도 어느 순간 의도치 않은 선택을 할 
때가 많다.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런 시행착오 없이 살 수 있을까? 자신 없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선택권이 없겠지.  


처음 맡은 업무는 어음교환이었다. 각 은행에서 그날 받은 다른 은행의 어음, 수표를 어음교환소를 통해 서로 정산하는 것이었다. 보통 그날 어음이나 수표를 입금하면 어음교환이 종료되는 다음날 오후에 현금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모르는 일반인이 종종 왜 바로 현금으로 인출이 안되는지 묻곤 한다.  영업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은행 어음을 취합한 가방을 들고 명동동성당 옆 어음교환소 분소로 달렸다.  접수 마감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늘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대기해야 했다. 본격적인 교환 업무는 그다음 날 새벽에 시작되었다. 새벽에 2인 1조로 강남에 있는 어음교환소로 가 본격적으로 정산을 했다. 모든 은행 어음교환업무 담당자가 책상에 자기 은행 보관함에 들어 있는 어음들을 각자 책상에 쏟아붓고 출력한 정산서와 대조를 하는 작업이었다. 보통 2-3시간 정도 걸렸고, 은행에 복귀하면 오전 10시 정도가 되었는데 그러면 쉬다가 남들이 영업 마칠 때부터 교환업무가 시작되는 구조였다.   


매일 같은 일과가 반복되던 어느 금요일. 그날도 둘이서 열심히 어음을 맞추고 있는데 딱 1억 원 수표 한 장이 부족했다. 아무리 여러 번 계산을 해보아도 도통 맞지가 않았다. 9시가 다 되도록 수표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이었다. 1년 차 신입행원이 1억 원 수표를 분실했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은행 입사를 후회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하는 수 없이 먼저 담당 대리님에게 보고를 했고 대리님이 곧바로 교환소로 달려왔다. 대리님에게 ‘어음들이 들어 있었던 철제함을 여러 번 찾아봤는데 없었다’고 했다. 대리님도 철제함을 보더니 없다고 했다. 최후의 방법으로 그날 교환업무 중에 발생한 휴지등을 담아놓은 마대자루를  쏟아붓고 일일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 키보다 더 큰 마대자루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눈을 부릅떴다. 시간은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과장님을 통해 지점장님께 보고되었다. 한 달 월급 100만 원 정도인 내가 1억 원을 물어내야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엊그제 그렇게 취직했다고 좋아하면 아버지 회갑도 멋지게 치렀는데.  


과장님이 오셨다. 다시 철제함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함소리 ‘여기 있네’. 철제함 뒤편 틈새기에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수표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가져갔다가 방금 전에 일부러 갖다 놓은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내가 철제함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는 말을 듣고 대리님도 건성으로 본 것 같았다. 은행에 합격한 때보다 더 기뻤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 이런 기분인가. 그날 저녁 대리님을 따라 신사동 지하 술집으로 갔다. 난생처음 밴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데 그 취기가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은행을 그만두고 공무원에 임용된 후 나에게 그토록 힘이 되어 주셨던 그 대리님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들었다. 삼가 대리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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