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형 집으로 갔다. 삭발한 내 모습을 보고 형이 물었다.
"먼 일이냐. 머리를 빡빡 밀고?"
"응, 은행 그만뒀어, 형처럼 공무원 시험 보려고"
"아버지한테는 얘기했냐"
"아니, 말씀 못 드렸어, 나중에 합격하고 말씀드리려고"
"내년 시험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있는데 어떻게 공부하려고"
"내년이 아니고 내일모레 5월 시험 볼 거야"
형은 깜짝 놀라 물었다.
"3개월 남았는데 어떻게 준비를 해, 과목도 한두 개가 아닌데"
"해 볼 거야. 그래도"
조금만 신세를 지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이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4월 26일 총무처 9급 시험일까지 딱 3개월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은행을 그만뒀기 때문에 나는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 잠이 오면 자고 아니면 공부하고 둘 중에 하나였다. 오랜만에 다시 책을 보려니 암담하기만 했다. 안 그러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무턱대고 은행을 그만두었다는 생각이 수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일단 테이프를 반복해서 듣고 무조건 외우기로 마음먹었다. 국어, 영어, 국사는 마지막 달에 보기로 하고 매일 15개씩 형법, 형소법, 행정법 테이프를 돌려 듣고 다짜고짜 기출문제를 풀었다. 처음 접하는 과목들이라 생소했다.
하루 종일 한마디로 하지 않고 책만 보고 테이프만 들었더니 집으로 돌아갈 때 이가 시리고 아팠다. 말을 한다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예전에는 몰랐다. 터벅터벅 걸으며 말에 대해 생각해 봤다.
말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묘하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아픈데 어떤 사람은 짧은 한마디 말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한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옛날 얘기도 있으니 어쩌면 말은 마법사다. 어떤 때는 칼처럼 날카롭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강철 같은 얼음을 녹여주는 듯 부드럽기도 하다. 말하는 대로 이루 진다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이 제일 마음에 든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시험에 합격했다'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4. 26. 시험일이 되었다. 후회 없이 공부했다고 생각했고 자신 있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기출문제에서 보았던 문제였다. 마지막 과목인 행정법 답안 마킹을 하는데 15번 문제 마킹을 2번이 아닌 3번으로 잘못했다. 100% 아는 문제를 잘못 마킹했던 것이 순간 너무 아깝다고 생각되어 감독관에게 답안지를 바꿔달라고 말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바꾸겠어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칠판 위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은 10여분 정도였다. 갑자기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떨었다. 감독관은 나한테 받은 답안지를 단숨에 반으로 접어 찢었다. 내 3개월이 함께 날아가듯. 쿵쿵 뛰는 내 심장의 박동소리에 옆자리 수험생이 놀라는 것 같았다. 사인펜을 쥔 오른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 답안부터 마킹하기로 했다. 종이 울리면 인적사항은 감독관에게 빌어볼 생각이었다. 긴가민가했던 몇 문제도 다시 봐야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시험지에 표시된 것을 보면서 답안지에 마킹을 해 나갔다. 어떻게 마킹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벨이 울렸다. 이름도 제대로 쓴 것 같지 않았다. 시험장을 나서는데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3개월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만 밀려서 마킹을 했다면 보나 마나 낙방이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위안하기로 쉽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마킹을 했는데 제대로 했을까 밤마다 합격, 불합격이 교차되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일 새벽같이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고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조심스럽게 수험번호를 눌렀는데 응답이 없었다. 긴장되었다. 혹시 수험번호를 잘못 눌렀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화기를 내렸다가 다시 수험번호를 눌렀다. ‘축합 합니다. 합격입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합격이라는 그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