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사직할 때 큰소리쳤던 대로 7급 도전. 전략을 새롭게 세웠다. 7급은 아무래도 독학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노량진에 독서실을 얻고 학원수업을 듣기로 했다. 은행 다닐 때 모아둔 약간의 돈으로 월 14만 원을 내고 작은 독서실에서 지냈다. 말이 독서실이지 책상 밑으로 의자를 밀어 넣고 그 속으로 발을 뻗어야 겨울 일자로 누울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고시학원에 등록을 하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미 9급 시험에 합격한 때문이었는지 이전의 투지는 온데간데없고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합격수기만 몇 편 읽고 빈둥거리기 일쑤였다.
한 달 정도를 그렇게 보내고 독서실로 돌아오는데 문 앞에 낮 익은 동네 후배가 서 있었다. 웬일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형 아버지가 쓰러지셨대요.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지금 어디 계신데?”
곧 7급 시험 합격 소식을 들고 찾아뵈려고 했는데 쓰러졌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전주 예수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머리가 다 깎인 채 침대에 누워 뇌 CT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눈을 꼭 감고 아무 말씀도 못하셨지만 엊그제 삭발한 내 모습과는 달리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조용히 침대를 밀며 기도했다.
’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
'아무 말 없이 은행을 그만둬서 쓰러지셨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 동안의 검사가 진행된 후 수술이 시작되었다. 장장 4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혈압이 좀 높으셨고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다. 밭에서 일을 하시다가 쓰러지셨고 동네 사람에게 발견되어 가까운 남원에 있는 병원으로 가셨다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여 예수병원으로 옮기셨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미 골든타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고 했다. “곧바로 이 병원으로 오셨더라면 좀 더 상태가 괜찮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뇌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두 달간의 중환자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병시중으로서 7급 시험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병원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잠자는 것, 먹고 씻는 것 등 모든 것이 불편했다. 나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는지 10일 지나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셨다.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고 밝게 웃으시며 내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예”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내 이름은 불려지지 못했다. 아버지가 입을 때려는 순간 곧바로 내 이름 대신 쌍스런 욕이 나왔고 그것이 전부였다. 욕 한마디가 전부였다. 뇌의 언어기능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재활치료의 시작. 매일 재활치료실로 가서 걷기 연습을 하고, 색깔 맞추는 연습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고 익숙한 노래로 연습을 했다. 두만강과 아리랑이었다.
'두--, 아—'함과 동시에 욕이 나왔다. 답답함에 고함을 지르려 하고 때로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모습에 절망했다. 내가 의사가 아니라는 무력감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버지 앞에서 나는 이렇게 두 다리로 잘 걷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형벌 같이 느껴졌다. 애초에 나의 기도가 잘못되었다.
'아버지를 예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했어야 맞았다.
중환자실의 간호사들은 참으로 대단했다. 한밤중에 출근해서 잠시도 쉬지 않고 환자들의 혈압, 체온을 체크하고 대, 소변을 직접 받아냈다. 불쑥불쑥 일어나 던지는 내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모습을 보니 정말의 백의의 천사가 따로 없었다. 재활치료가 진행되었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60여 년이 넘도록 부지런히 걸어오셨는데 두 달 동안 혼자서 한 걸음도 걷지 못하셨다. 60 평생 좋아하시는 노래도 마음껏 불렀지만 두 달 동안 한 소절도 못 부르셨다. 마냥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와 두 달을 같이 했다. 옷을 입혀드리고, 손을 잡아 주고, 얼굴을 씻어드리고. 쓰러지지 않으셨다면 한 번도 다정하게 손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병원비도 계속 밀리고 재활도 진전이 없어 결국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반신마비 상태였다.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니 몸이 두 배로 무겁게 느껴졌다. 누워계시고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계시는 것, 그리고 예전처럼 툭하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고 하시는 것이 전부였다. 불행 중 다행히 그나마 왼손을 가동이 가능했다. 왼손으로 이를 닦고, 밥을 드셨다. 처음에는 한, 두 살 어린애처럼 서툴렀는데 차츰차츰 나아지셨다. 반복의 힘. 가끔 아시는 분들이 병문안을 오실 때마다 '어떤 약을 먹고 걷게 되었다, 어딘가에서 침을 맞고 말을 하게 되었다'더라는 고급(?) 정보들을 알려줬다. 그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강원도에 있는 침 집, 해남에 있는 한약방에 이르기까지.
그해 11. 10. 나는 발령을 받았고, 아버지는 10년에 걸친 긴 투병 끝에 끝내 내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