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커지는 도시와 지방의 문화격차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2003년은 처음 지하철을 탔던 해이다. 외할머니가 당시 서울 동대문구에 살고 있어서 명절 때마다 가족과 함께 지방에서 올라왔었다. 오랜만에 보는 많은 친척들은 어린 나와 사촌들에게 용돈을 많이 주곤 했었다. 용돈을 두둑이 챙긴 나와 사촌들은 지하철을 타고 롯데월드에 가기 위해 집 근처 1호선 회기역으로 향했다. 사촌 중에 서울에 사는 이도 있었지만, 나처럼 지방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약속한 것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나를 비롯한 사촌 몇몇은 알록달록한 지하철 노선도와 미로 같이 복잡한 출입구에 경악했고, 마치 해외여행을 처음 하는 것처럼 승차권을 어떻게 사는지 허둥지둥 대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숏폼처럼 또렷이 재생된다. 승차권을 투입구에 어떻게 넣는지 모르고 그 출입구에 테트라포드처럼 생겨 밀면서 들어가야 하는 장애물이 너무 거대해 보였다. 먼저 게이트를 통과한 다른 사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놀려대기도 했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나에게 서울은 그런 도시였다. 없는 게 없는 도시. 볼 것도 많고 사람도 많고 또 할 것도 많은 곳. 중학생이 되자 친하게 지내던 친구 중에 한두 명이 서울로 전학을 가기도 했다. 매년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외할머니댁에 방문했으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질투도 커져만 갔다. 전학 간 친구들은 하나같이 자랑을 해댔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가 살던 소도시에서는 보고 싶은 영화를 개봉하는 날짜에 볼 수 없었다. 개봉한다는 날짜에 맞춰 영화관에 가도 상영시간표에서 보이지 않았다. 영화 개봉 날짜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맞춰져 있었고, 내가 살던 곳에서는 하루나 이틀, 더 늦으면 삼일 뒤에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 내 버릇 중 하나는 보고 싶은 영화가 개봉하면 영화관에 전화해 상영이 언제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재밌는 영화는 금방 입소문이 나고 당시 싸이월드 같은 곳에 특정 장면이나 명대사가 도배되곤 했다. 그런데 그 도배하는 사람들은 이미 영화를 개봉 날짜에 본 것이고, 나는 여전히 못 본 상태에서 스포일러를 당했다. 그때도 유행은 ‘도토리’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줄거리나 반전 등을 영화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어떤 기업도 못 버티는 소도시
제천에 영화관은 뭐가 있냐, 는 질문에 TTC라고 답하는 사람은 찐 제천사람이다. 홍대역 9번 출구, 강남 뱅뱅사거리 등 만남의 장소이자 그 지역주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상징적인 곳이 있는데, TTC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학창 시절에 영화 상영을 책임졌던 그곳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메가박스로 변모했다. 점차 대기업의 자본논리에 잠식돼 가는 모습을 보며 그때는 사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게가 제천에는 완전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시내 중심가에 롯데리아, 캔모아가 전부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메가박스가 들어왔으니 서울사람은 전혀 신경도 안 쓰지만 어린 나이에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제천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로 영화인 사이에는 그래도 꽤 유명한 지역이다. 매년 한 번씩 열리는 행사는 지역 주요 영화관과 중심 거리, 명소 등에서 이벤트도 하고 영화 상영도 한다. 메가박스도 마찬가지로 주요 장소 중 하나였다. 이러한 음악제 인기에 힘입어 최근 CGV 영화관이 하나 더 생겨났다.
사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줄어드는 추세에 더해 안 그래도 대도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노인인구는 늘어나는데, 영화관이 하나 더 생긴다고 했을 때 우려스럽긴 했다. 그래도 수요가 있으니 기업에서 결정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히 오판이었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언제나 취약한 곳에 더욱 심각한 상흔을 남긴다. 삼 년 전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뒤덮었을 때, 기존에 있던 메가박스가 문을 닫았다. 결국 CGV 영화관 하나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마저도 영업 중단하기로 결정이 났다. 이렇게 되면 약 13만 명이 사는 시에 영화관이 한 개도 없는 것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가까운 충주나 강원도 원주로 ‘원정 영화‘를 떠나야 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고 한다.
조그마한 영화관도 괜찮다
지방에 살아본 사람만이 지방을 이해할 수 있다. 평생을 서울이나 수도권에 살면서 지방소멸대응을 이야기하는 건 모순이다. 유명한 요리연구가인 백종원 씨가 여러 지방에서 그 지역특색을 살린 음식을 팔고 거리를 조성하는 건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 그러나 유명세를 활용해 일시적으로 많은 사람이 방문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방법으로 보기에는 힘들다. 인기 연예인이 방문한 식당에 갑자기 사람이 몰릴 수는 있겠으나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즉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온다고 해서 많은 지역주민이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는 지역 문화예술발전과 '문화복지'의 측면으로 바라봐야 하고, 불가피하게 공적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명실상부 음악영화제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 행사가 열리는 지역에 영화관 하나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작은 영화관도 좋으니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