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포텐 셋째 날

2023.10.30

by 하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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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30분가량 떨어진 마을에서 보트를 타고 가야 하는 bunes beach에 가려고 일찍 나섰다. 30분 일찍 도착한 선착장. 아무도 없었다. 가장 오래 준비한 일정이었다. 비수기라 보트가 하루에 딱 한 번씩 뿐이다. 시간표를 저장해 두고 이날이 가장 적절하다 싶어 가기로 결정했다. 흩날리는 눈발과 서늘한 공기, 무엇보다 현지인마저도 보이지 않는 장면이 뒷 내용을 귀띔해 주었다. 정각이 되었지만 보트도,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준비한 것에 비해 아쉬움이 크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하나의 장소를 떠올렸다.

바로 레이네브링엔이다.

어제 하이킹이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하이킹 장소를 몰색 하며 지난밤을 보냈다. 그중 레이네브링엔은 내 계획에 없었다. 이탈리아 친구들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시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한테 하이킹 하나를 추가할 시간이 없었다. 우연히 비어버린 시간을 이것으로 채우기로 했다.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4-5만 되어도 깜깜하기 때문에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20분가량 걸어 하이킹 입구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도 ‘등산을 'strongly' 추천하지 않습니다’라는 경고문을 여럿 보았고, 눈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두려움이 살짝 스쳐 지나갔지만, 자신감이 온몸을 뒤덮고 있어 두려운 마음이 나의 속으로 까진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가보자 안되면 내려오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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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을 오르기 위해서 1978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처음엔 크게 감이 오지 않았다. 계단을 오른 지 10분도 되지 않아 1978이 얼마나 큰 숫자인지 깨닫게 되었다. 끊임없는 계단이 이어졌다. 각 계단의 높이는 예상보다 많이 높았다. 그냥 건물의 계단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거의 무릎 위치까지 왔다. 매 걸음마다 다리를 무릎 높이까지 들어 올려 한 다리로 나와 가방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어제도 상당한 난이도의 하이킹이었는데 오늘의 체력 소모는 차원이 달랐다. 10-15 계단마다 쉬었던 것 같다. 괜히 신발 끈도 다시 묶어보고, 눈사람도 만들며 느긋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항상 포기는 사용하기 아까운 시점에 등장한다. 반이 넘어가고 삼분의 이 가량 다다랐을 때쯤, 발걸음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렵게 왔는데? 다시 또 도전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끝은 보고 가자.. 하고 꾸역꾸역 오르다 보니 앞서 올라가던 두 사람을 보았다. 동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조금은 힘이 났다. 둘을 보며 올라가는데 나 못지않게 자주 멈추어 숨을 고르는 것을 보고 피식했다. 100미터가량 남았음을 알려주는 표지판 앞에서 결국 만나 같이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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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태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잠시 물을 마시고, 경치도 보고 다시 올라갔다. 몇 걸음 안가 안개가 짙어지고 눈발이 날리다가 눈바람아 불기 시작했다. 이 산이 정말 무서운 게 너무 가파르고 돌계단이라 너무 미끄러운데 절벽을 타는 기분이 든다. 고소공포증이 없는 내가 뒤를 돌아보기 두려울 정도이다. 이 와중에 바람이 불어오고 무거운 가방으로 한번 기우뚱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계단이 높아 눈이 쌓여도 길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으나 계단길이 끝나자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고지가 보이고 5분 안에 정상에 설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산 능선을 위태롭게 올라야 가능했다. 지금까진 와 이거 위험한데? 정도였는데, 지금 내 상황을 보니 이거 까닥하다간 죽겠네? 싶었다. 며칠 이곳에 있어 본 결과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것을 학습한 나는 정상 코앞에서 주저앉아 조금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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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렸다. 눈은 그칠 기미가 안 보이고, 반경 10미터 이내의 눈과 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같이 온 태국 사람들이 위험하니까 같이 내려갈 것을 제안했다. 이거 어제랑 완전히 같은 상황이잖아? 조금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무서워 그러자고 했다. 내려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어제는 두 배 빨리 내려갔던 것 같은데 오늘은 돌이 너무 미끄러워 한참이 걸렸다. 앞서가던 두 사람은 미끄러운 부분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알려줬다. 우린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를 말 그대로 직역해 실천하고 있었다. 발로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려보고 나를 맡겨도 되겠다 싶으면 내디뎠다. 그렇게 열심히 내려가다 보니 더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한 가족을 만났다.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미끄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실망한 표정을 보니 희망적인 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조심조심 내려오다 보니 출발 지점이 보였다. 나를 신경 써준 태국 사람 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인증샷도 찍고 초콜릿도 얻어먹고 행복한 여행을 기원하며 이별을 했다.


이틀째 완등을 못했다는 아쉬움에 출발 지점을 떠나지 못하고 삼각대를 꺼내 들어 사진을 마구마구 찍었다. 휴대폰, 가방, 머리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마치 눈 오는 길 위의 길고양이 같았다.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한 탓에 실컷 놀아도 11시가 되지 않았다. 첫날에 버스 사정으로 가지 못했던 마을을 둘러보려고 움직였다. 눈이 가장 많이 온 날이라 온몸이 눈으로 덮여도 설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아무도 밟지 못한 새하얀 눈에 발자국도 마음껏 남기고 냅다 누워 천사도 만들고 이름도 적어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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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무려 1시간이나 붕 떠버렸다. 그 옆에 작은 마트가 있어 들어가 보니 기념품과 간단한 스낵을 팔고 있었다. 로포텐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기념품을 하나 사고 싶었으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핫도그를 사 먹었다. 원래 여행 중엔 점심을 잘 챙겨 먹지 않는다. 하지만 이른 아침 산행으로 체력이 바닥났고 반나절 이 넘게 남았는데 벌써 배가 고팠다. 북유럽 국가답게 가격이 사악해서 메뉴를 둘러보다가 세일한다는 핫도그에 대해서 물어보니 사슴고기 소시지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가난한 주머니 사정으로 1 여행 1 현지식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사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것도 언제 먹어보겠나 싶어 바로 하나 달라고 했다. 지금까지 먹은 핫도그 중에 비주얼도 맛도 가장 단출했다. 간단하게 허기를 채운 후 버스를 타고 옆 마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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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함노이 귀여운 마을이다. 이곳은 마을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그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통 집의 색깔과 위치, 산 능선의 모양과 표면의 질감, 물의 색깔, 물결의 모양 등 각각이 다르게 조합하여 비슷한 결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고,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함노이에서 걸어서 올래닐소야 마을로 넘어갔다. 그 길은 몇 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또 예술이다. 함노이보다 올래닐소야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다른 곳과 다르게 노란 집에 알록달록한 카약이 물 위에, 그리고 집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에메랄드빛 물 색깔과 함께 시각적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곳에서 어젯밤 찾아놓은 트래킹을 다시 한번 시도한다. 사실 트래킹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언덕 수준의 높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올라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은 곳인지 따라갈 발자국도 별로 없고 등산로가 명확하지 않았다. 발자국만 따라가자 하고 올라간 정상은 또 다른 아름다운 장면을 선물해 주었다. 한참을 멍하니 구경하다 사진도 찍고 버스를 타기 위해 내려왔다. 이곳에서 버스를 놓쳤다간 그대로 동사다. 그래서 항상 삼십 분 일찍 움직인다. 하지만 버스는 늘 늦는다. 당연하게 사람들을 태우고 티켓을 끊으면 시간이 지체된다. 동시에 내 손도 코도 얼어간다.


여기 일몰이 3시33분이랜다..어두워지면 불빛이 너무 없어 위험하기 때문에 늘 5시 전에 귀가해 씻고 저녁을 먹고 오로라를 기다리며 내일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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