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에서 경매를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읽고

by 돈끼호떡
"대중에게 감상이란 없다. 그들은 다른 혹성의 주민인 양 당신이나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일요일 신문 기사에서 며칠 더 명맥을 유지하든가 부고란에서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뿐이다." (p.78)


어느 거리에 구걸하던 남자가 있었다. 나의 주머니에는 잔돈이 있었고 플라스틱 소쿠리에는 천 원이 있었다. 오래된 질문이다. 얼마를 주어야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루를, 일주일을, 미래를 살아갈 수 있을까. 실제로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그 무슨 오만한 말이었는지. 나는 무엇을 계산하고 싶었던 걸까. 혹 지나치지 못했던 어떠한 동정심을 스스로 덜어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나. 만약 그랬다면, 그 무게는 얼마면 되었을까.


몇몇 지인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고 아직 이렇다 할 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읽는 내내 한 곳으로 내몰렸다. 그는 긴 시간을 쭈그려 앉다가 결국 여기에 불렸다. 그리하여 나는 혐오스러운 인간임이 드러났다.


“생명과 죽음의 속성이 애처롭게도 뒤죽박죽이 되는 이유는 생명이 죽음으로 바뀌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또 그 둘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p.76)


음식은 접시에 오른다. 음식물은 접시에 묻는다. 물(物)이 붙냐 안 붙냐에 따라 냄새가 바뀐다. 이러한 관계는 밥을 먹으며 명확해진다. 시금치를 먹다가 상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곧바로 휴지를 뽑아 입을 가린다면, 뱉어내는 과정에서 음식은 역겹고 혐오하기 마땅한 물성을 얻는다.


반면 손을 주머니에서 빼는 데에는 혐오랄 것이 없다. 그러나 주머니에 동전이 있고 고개를 숙인 남성과 플라스틱 소쿠리가 보이면, 손은 무의식적으로 숨는다. 그와 만나기 전에도 소쿠리는 다른 색으로 등장하곤 했었다. 그때도 나오지 않았던 손을 이번에는 나와야 한다는 데에는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너무도 컸다.


“미덕에 대한 사랑은 타인의 인간적 결점들을 독살스럽게 관용하지 않음을 뜻하며 이것으로 자신이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악습을 벌충한다.” (p.44)


언젠가 남자가 앉아 있던 자리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계단은 담배꽁초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했다. 당연히 그도 없었지만, 오직 나만이 그를 그 자리에 계속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모든 건 나의 이야기로 주머니 속에서 경매되고 있었다. 양심을 살 사람도 팔 사람도 처음부터 없었다. 질문을 던지며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던 건 바로 나였다.




참고서적: 윌리엄 해즐릿,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 아티초크, 인용(p.44, 76,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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