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번 찾아가는 사랑

『돌봄의 얼굴 - 요양보호사들의 일기』를 읽고

by 돈끼호떡

이마에 글씨가 나타나면 좋겠다. 기쁠 때는 기쁨, 슬플 때는 슬픔, 화날 때는 화가 난다는 식으로. 카메라 앞이면 늘 불편이 앞선다. 무뚝뚝한 나에게 ‘웃어’라는 말만큼 어려운 부탁도 없다. 어렵사리 만난 자리를 기록하겠다는데 즐겁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표정이 나를 의심케 한다. 왜 미소를 보이지 않지? 즐겁지 않은가?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혹시 당신도?”라는 의구심을 던진다. 마주 보고 대화한다지만, 본심은 어떨까. 시를 사랑하게 된 건 그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문장에는 정제된 마음이, 문장은 나를 의심하지 않고 나는 문장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읽는 순간, 알 수 없는 친밀감이 새겨지곤 했다. 그게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가족은 이렇게 돌보지 못해요’가 돌봄 노동자의 전문성을 강조한다면, ‘가족처럼 돌봐요’는 돌봄 노동자의 진심을 가리킨다. 같은 사람이 모순된 용법으로 사용하는 ‘가족’은 더 넓은 사회문화의 배경 아래 모순을 또렷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모순 없이 이해된다. (p.81)


사회복무요원으로서 어느 요양원을 다녀온 후로 시인(詩人)은 내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는 떠나며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어디서나 통했다. 일손이 부족해 더러워진 침상이나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어머니의 핸드폰을 잠근 일이나 아들을 연기하다 못해 도망쳐버린 누군가의 변명 속에도. 누구에게나 이유는 있었다. 누구에게나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을 향한 사랑은 결코 하트 모양이 아니었다.


“어르신, 시든 꽃은 잘라버릴까요?”

“자르지 마!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게.”

누가 우리 어르신을 인지 장애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p.43)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요양원에 가더라도, 일주일에 두세 번 찾아갈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독서 모임에서 우연히,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튀어나온 나의 사랑법은 내뱉은 사람마저 놀라게 했다. 갑작스레 펼쳐진 마지막 페이지에 모두 실소가 터졌지만, 문장은 전해지지 않았다.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받아들일 수도 없을, 그러나 먼 미래에는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질 어떠한 선언처럼.


“치매 어르신들 대화는 거의 독백일 때가 많아요. 그때는 그 어르신 눈높이에 맞춰 앉은 자세로 어르신 눈을 보면서 어르신 손을 잡고 천천히 말을 하면 들으시고 대답을 하신답니다.”(p.228)


어린아이와 마주치면 눈부터 피한다. 순수한 세계가 탁한 눈망울로 얼룩지지 않도록, 처음 보여주는 표정은 온화한 미소였으면 싶었다. 이런 걱정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연되었다. 한 어르신이 나의 구겨진 옷깃을 여며주신 적이 있었다. 침상이 떨릴 듯한 손짓으로 깃을 세워주시는 사이,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르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서, 그 무방비한 세계에 의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심의(心意)는 언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의 삶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그를 돌보는 일은, 계약서에 적혀 있는 의무를 거의 언제나 초과한다.(p.318)


언어는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계약서에 새겨지더라도 누군가의 입으로 발화되는 순간 마음과 함께 떠오른다. 통상적인 의미가 무안해지도록 사랑은 어디론가 부유한다. 시인(詩人)이 아닌 시인(時人)이 되어 이 사랑이 ‘사랑’으로 박제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랑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늘어나는 주름에서 질긴 사랑을 발견할 때까지.



참고서적: 김영희 외 9인, 『돌봄의 얼굴-요양보호사들의 일기』, 옥희살롱, 인용 p.43, 81, 228,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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