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내가 시험장 감독관이 된 일이 그렇다.
나는 늘 자격증 시험을 치러 갈 때마다 마지막 1분 전까지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시험을 마친 사람들이 일정 시간 후에 먼저 퇴실할 수 있는 구조의 시험인 경우, 시험장 감독관 2명과 나 - 이렇게 오롯이 셋이서만 머쓱하게 앉아있었던 적도 있다. (머쓱타드;)
그럴 때 나는 그 두 분을 일찍 퇴근시켜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앉아있는 내가 빨리 가길 바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나 하고 싶은 대로 하자!' 하고 어찌 되었든 있는 힘을 다 쥐어짜 내 시험에 최선을 다하고 나오는 편이었다.
시험장 감독관이란 걸 내가 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할 생각도 안 했는데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시험장 감독관을 하게 되었다. 감독관으로서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시험장 내부 규칙을 숙지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다.
우선 내부 규정을 숙지할 시간이 많지가 않다. 신분증 파악 규정과 불일치 시 처리 방법, 부정행위자로 간주할 수 있는 사항들, 일정 시간마다 종을 울리고 시간을 체크하는 일, 핸드폰을 수거하고 각종 전자기기 모두 앞으로 내라고 알려야 하는 일... 기타 등등을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해야 한다.
1교시 이후 2교시에 이어서 시험을 계속 치르는 경우, OMR은 1교시와 2교시가 다르다. 이걸 한 번에 같이 배부하는 경우, 첫 번째 과목의 OMR부터 먼저 채우라고 안내하고 1교시 시험 후, 바로 거둬가니 마킹을 함께 하며 진행하라고 얘기해야 할 때가 있다. 근데 안내했는데도 불구하고 마킹을 제때 하지 않은 사람의 답지를 거둬가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 마음이 참 안타깝다.
사소한 것들도 있다. 지금 화장실에 가도 된다고 해야 하는지, 물이나 음료수는 원래 책상 위에 두면 안 되지만 감독관 재량으로 양해해 줄 수 있어서 그 부분은 어떻게 할지. 생각보다 감독관 재량에 달린 부분이 많고, '이렇게 일이 허술하게 진행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얼렁뚱땅 시험이 진행되기도 한다.
진땀이 나기 시작한다. 일단 사람들이 시험장에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면, 가장 중요한 시계를 칠판 꼭대기 위에 올려둔다. "잘 보이시나요?"라고 얘기하며 반응을 보면 다들 무언의 끄덕거림으로 회신을 준다.
나는 일단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시험장 감독관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나만 쳐다본다. 이게 진짜 미치는 포인트다. 하지만 당황한 것을 티 내면 안 된다. 나는 감독관이니까...ㅋㅋㅋ 내가 시험을 치러온 사람이었을 때, 감독관이 OMR을 촥촥 정리하는 모습은 멋있었고 내가 똥줄 타며 시험을 치르고 있을 때 여유롭게 앉아 멍 때리는 모습은 부러웠다.
지금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도 날 보며 그런 생각을 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재빠르게 OMR카드를 정리한다. 시험지에 홀수/짝수가 나뉘어 있으면 그것도 빠르게 정리. 그리고 결시자를 파악한다.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불러본다. 잘못 앉아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리를 옮기라고 한다. 결시자 현황 목록에 결시자 수를 기입한다.
OMR 카드를 배부한다. 수정 테이프 관련 안내 사항을 하고, 손을 들면 OMR카드를 바꿔주겠다고 한다. 전자기기는 이미 다 거뒀고, 감독관 확인사항에 사인하는 부분도 미리 체크를 해둔다. 엄숙한 시험 시간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난 자유다!
시험 치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떤 소설에서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위치에 한 번 서봐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시험 치는 수험생이었을 때 감독관을 보며 부럽기도 하고, 눈치 보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정을 겪었는데, 감독관이 되어서 수험생들을 바라보니 생각보다 아무 생각이 없다.
일단 시험이 무사히 끝났으면 좋겠다. OMR카드를 바꿔달라는 것은 괜찮지만, 갑자기 부정행위를 하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다거나 지진이 난다거나, 뒤구르기를 한다거나 하는 돌발상황이 일어나면 난감하다. 제발 무사히 끝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마음으로 빈다.
그리고 시험 치는 사람들을 볼 때, 표정과 행동만으로 저 사람이 시험을 잘 치르고 있는지 아닌지, 누가 합격할지 같은 게 은연중에 느껴지기도 했다. 앞에 서 있어 보면 느껴지는 것들은 그랬다.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냥 시험 시간이 무사히 끝나면 그걸로 됐었다. 수입도 꽤 짭짤하다.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면 다시 바빠진다. 그들의 아쉬운 표정 혹은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뒤로한 채, OMR카드와 시험지를 모두 걷는다. 이때 OMR카드는 수험번호순으로 걷고, 다시 매수를 체크한 뒤 응시자 수와 맞으면 봉투에 넣는다. 각종 확인을 빠르게 완료하고 나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진심을 담아 외친다. 그제야 가방을 챙기며 일어나는 수험생들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화답하며 시험장을 떠난다.
같은 교실에 있지만 내가 응시자일 때와 감독관일 때, 입장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난다. 그리고 생각보다 모든 것이 허술하게 진행된다. 우당탕탕 그 자체인데, 그게 안 드러날 정도로만 일들이 굴러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니 너무 기죽지 말자. 저 사람도 인간이고, 그냥 돈 받고 하는 일이다.
업무를 하면서 협력업체나 하청업체와 전화할 때가 많은데, 그 사람이 나보다 잘난 것 같아도 생각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차분하게 하나씩 대처해 나가다 보면 나도 어느새 여러 상황에 서게 되고, 다양한 관점을 체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내가 더 깊어져 가는 것 같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Whatever.
너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이잖아.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잖아.
그런 마음을 익히기 위해,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