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하고 건강한 점심 한 끼
근데 진짜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왈왈이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날은 기분이 좋았다. (태풍이 닥치기 전 평온하듯이...) 사람들과도 잘 지냈고 밥도 잘 먹었고, 간식도 잘 챙겨 먹었다. 호기로운 기세가 몰려오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갑질 전화에 휘말렸다. 생애 처음으로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폭언을 "당했다"
계속해서 무한루프처럼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상대는 내가 끝끝내 무너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다만, 나는 누군가에게 압박을 당할수록 마음 밑바닥의 단단한 스프링이 더 강해지는 구조의 성향이라 눌릴지언정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날 모른 채 '신입 한 번 눌러보자' 하고 기를 죽이려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 거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직원은 평소 드센 성깔로 악명 높았지만, 당장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급격히 솟구쳐 올랐고 생각이 멈췄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저 가만히 폭동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몸의 호흡을 되찾는 것부터가 반격의 시작이니까.
신입 MZ 직원은 그 억울함을 제대로 풀 길을 찾지 못해 혼자서 분을 삭였다. 내 잘못이 있다기보다 트집이 잡힌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죄송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소음에 가까운 상대방의 샤우팅을 들으며, 수화기를 턱 내려놓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솔직히 말해, 호흡을 되찾는 일에 실패했다. 감정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눈물이 자꾸 나올 것 같았던 퇴근길에 '다음에 이런 일을 또 당한다면 제대로 갚아줘야지' 생각하며 오늘의 바둑을 복기했다.
- 감정을 조절했어야 했다.
- 감정이 올라올 것 같으면 상황을 일단 끊는다.
- 상대방이 화를 주체를 못 하면 화를 삭이고 오라고 말해야 한다.
- 왜 화를 내는지, 그렇게까지 화를 내야 하는지 물어본다.
- 먼저 상황을 종결시킨다.
- 죄송하다고 하지 않는다.
- 차분해져야 한다. 거리를 둔다.
- 상처를 통해 더 단단해지자
- 이기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잘 싸웠다.
웃긴 건, 생각보다 잘 싸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단 것이다. 상대의 폭언에 패닉이 올 뻔했지만 차분하게 대응했고 하극상을 하지 않았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갑질을 하고 싶었던 직급 높은 애송이한테 잘못 걸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지 같은 기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을 뿌리 삼아 일하는 나였다. 이런 그지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나면, 마음속 호수에 먹물이 가득 부어진 것 마냥 심란해진다. 더 많은 긍정을 넣어 정화하거나 시간이 먹물을 흘러내려 보내길 기다려야 한다. 이때 긍정의 힘을 더 가속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바로! 먹고 싶은 음식 맛있게 먹기!
포케는 평소 비싼 가격대 때문에 잘 먹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감정노동하는 나를 위해서 에너지를 수혈해주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고 챙기는 마음이 필요했다. 연어에 훈제오리고기까지 추가한 고급 포케를 한 입 먹는 순간, 돈을 벌 수 있어서 다행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삭한 양파 후레이크는 내 최애 부분. 고슬고슬한 현미밥과 특제 소스에 각종 야채를 비벼 한 입 크게 먹으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든든히 챙겨 먹고 돌아 나오는 길에 마음의 근육이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빌런을 어떻게 상대할까 하는 생각보다는 누가 뭐라 하든 나는 괜찮다! 나는 강하다! 하는 생각의 탄성이 조금 더 쫀쫀해진 느낌이었다. 원래 진짜 강한 캐릭터는 공격성이 높은 캐릭터보다 아주 빠르게 스스로를 힐링시키고 공격을 받아도 무던하여 대미지가 없는 캐릭터이다. 내공을 점차 쌓아나가 언젠가 그런 무적의 캐릭터가 되길 바라며 사무실 속으로 희망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