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디매거진 숏버스 May 27. 2021

여정 속 느슨한 연대를 그린 감독 ‘이김홍래’


과거 길을 걷던 중 꽤나 오래된 흰색 99년식 아반떼 차량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지 앞 유리에는 노란색 딱지들이 잔뜩 붙어있고 곳곳에 먼지가 쌓여 곧장 폐차장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과연 이 오래된 아반떼는 누가 탔던 것이며 어떤 사연을 갖고 이렇게 방치된 것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기억이 존재한다.


붙어있던 딱지를 뗀 듯한 흔적, 운전자 좌석에 어렴풋이 보이는 고지서들. 낡은 아반떼 차와 함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고등학생이 보인다. 연락을 받고 도착한 대리기사는 어른도 없이 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학생과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생 ‘영지’는 무슨 이유로 홀로 폐차를 하게 된 것이며 ‘수미’는 과연 영지와의 여정을 잘 끝마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연대를 그린 영화 <99년식>의 감독 이김홍래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영화 <99년식> 포스터


감독님 본인 소개와 영화 <99년식>의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영화 연출을 비롯한 영상 작업을 다양하게 하는 '이홍래' 입니다. 올해부터는 '이김홍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99년식>은 제 작품들 중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입니다. 두 여성이 '99년식 아반떼'를 타고 겪게 되는 여정 속에서 느슨한 연대를 가지는 이야기죠.



영화 <99년식> 감독 이김홍래


영화 <99년식>을 통해 다수 영화제에서 본선 진출 및 수상을 경험하셨습니다. 이 같은 경험은 감회가 남다르셨을 텐데, 어떠셨나요?

이 영화는 대학원 워크샵 작품으로 기획이 됐습니다. 초반에는 기획의 나이브한 부분에 대해 지적도 많이 받았고, 다양한 버전의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영화로 완성된 버전의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도 다들 큰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저조차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내겠다는 의의만을 가지고 임했었죠.


다양한 영화제를 경험하게 된 건, 그래서 제게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이 되었을 때는 눈물이 나더군요. 20대 때부터 선망했던 감독님들의 영화를 보며 공부했던 때도 스쳤구요. 상록수영화제에서 장려상을 수상했을 때도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 들지 않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 주는 것만큼 창작자에게 큰 힘이 되는 일은 없는데, 그게 현실이 되니 꿈을 꾸는 듯했죠.


홍콩국제영화제 본선에 올랐을 때도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팬데믹 때문에 결국 오프라인 영화제는 개최되지 못했지만, 제 영화가 아시아의 다른 걸출한 작품들 사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만으로 큰 영광이었습니다. 아직 그 여운이 제 마음에 남은 것 같아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뭉클합니다.


감독님의 예전 인터뷰에서 <인연인지>는 ‘새로운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 인터뷰에서 다루는 <99년식>은 ‘새로운 인연’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감독님이 ‘새로운 관계’ 혹은 ‘관계’에 대해 갖는 특별한 생각이 있으신가요?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인간 본연의 욕망에 기인하죠. 친해지고 싶다, 도와주고 싶다... 그런 마음들은 그 대상에 대해 자신이 가지는 어떤 욕망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을 닮고 싶건, 그 대상이 자신에게 뭔가를 떠올리게 했건, 내 결핍의 거울이라고 여긴 다든지... 그래서 관계를 맺고, 동행하고 싶고, 생각을 나누고 싶은 게 사람이죠. 그게 잘되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것도 사람이고요. 그런 과정에서 사람은 위로를 받고, 치유가 되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건 또, 자기가 원해서, 자신 안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99년식>은 영지가 가진 '위로받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수미가 가진 '보호하고 싶다'는 욕망이 만나 연대를 이룬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그날 하루 타인에서 모험의 동료가 되었는데, 그 새로운 관계는 서로 욕망이 충돌하기도, 또 서로 화합하기도 하면서 어떤 감정을 관객에게 불러일으키죠. 관객분들도 결국 그런 각자 가진 욕망을 거울처럼 영지와 수미에게 이입하면서 보셨지 않을까, 무엄하게 추측을 해봅니다.




감독님이 연출 의도로 말씀하셨던 과거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사람에게 다가온 버거운 과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영지처럼 보였습니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존재가 수미라고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것이 맞나요?

그렇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상처를 가진 채로 누구의 위로도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무작정 도로로 나선 영지에게, 폐차의 과정은 너무 힘겹죠. 거기에, 타인에 대한 믿음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오지랖 넓은 수미의 존재는 영지에게 처음엔 짜증 나는 아줌마에서 인생 선배, 엄마, 친구로 변화하죠.


영지가 바보라서 이런 도움을 받는 건 아닙니다.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게 너무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이라 하기 싫다는 마음도 영지에게 동시에 있죠. 그런 과정을 함께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영지는 영화가 끝난 후의 인생에서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엔딩 장면에 그런 기대를 담아 촬영했고요.




영화는 딸과 엄마라는 관계보다는 ‘여성’이라는 관계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제작할 당시 감독님은 어떤 관계에 더욱 중심을 두고 디렉팅 하셨나요?

제게는 이 질문이 무겁고 복잡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생득적으로 남성 성별을 가진 사람이기에 여성 성별이 겪는 문제들을 다 피부로 알고 있지는 못해요. '여성이라는 관계'라는 말 역시 제가 답을 잘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연출을 할 때 배우들에게는 최대한 '여성이라면' '여성이어서'와 같은 수사는 피하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그럴 때가 있잖아요?'라는 식으로 접근하면서, 두 배우가 가진 경험, 혹은 경험은 안 해봤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떠오른 감정들을 듣고 그것을 적용하여 장면을 만들어 가려고 했습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를 많이 참고했고, 고등학생과 40대 여성들에 대한 취재도 하면서 캐릭터를 잡아갔고요.


다만, 질문처럼 두 사람이 '유사 모녀'처럼 보이기를 원하진 않았습니다. 모녀가 아닌, 그저 나이 차이가 있는 동료 사이이고, 처음 모험을 떠나는 초보와 베테랑 모험가의 사이처럼 보였으면 했어요. 엉망진창인 첫 모험에서, 인생 만렙인 분에게 도움을 받으면, 정말 인생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되니까요.




아버지의 오래된 차 폐차 과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추억이 쌓인 자동차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과 동일시하게 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99년식>에서 자동차는 감독님께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부모님의 오래된 차가 폐차되는 과정을 겪은 후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그 차량은 2000년식 옵티마였는데, 폐차 전에 물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과거 물품들이 나왔어요. 부모님들이 어디로 다니고, 무엇을 듣고 살았는지... 그런 것들을 싣고 20년 가까이 도로를 달린 그 녀석은 말만 안 통하지 가족이나 다름없었죠. 그런 존재를 폐차하는 일은 하나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지는 이 영화의 여정 속에서 부모님의 장례 과정을 마무리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거죠.


폐차뿐 아니라 중고차 매매에 관련한 경험도 이 이야기에 많은 영감을 줬어요. 아버지의 중고차 구매를 따라갔다가 대포차 사기를 당할 뻔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고차 매매상인 두 남성분 캐릭터가 좀 재밌었어요. 이 경험이 영지가 만나게 되는 사기꾼 캐릭터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공인 폐차장에서 폐차를 앞둔 영지의 모습은 마지막 엄마의 곁을 지키는 딸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영지의 뒷모습을 화면 안에 담아냈는데, 그 장면에서 영지의 감정을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장면은 입관식을 생각하며 연출했습니다. 오래전 할머님을 떠나보내던 순간, 입관을 할 때 그저 아무 말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그 관을 바라만 보고 있게 되더군요. 그가 생전에 했던 말들, 표정들, 물건들이 한 번에 다 스쳐 지나가는 듯했거든요. 그때 저는 친엄마를 잃은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의 뒷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뒷목덜미와 어깨만으로 그 얼굴이 그려지는 듯했어요. 그런 마음으로, 그 샷은 영지의 뒷모습만을 담기로 결정하고 촬영했습니다. 영지가 어떤 얼굴이었을지는, 사실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요.




영지라는 캐릭터는 날이 서있고 가시가 돋아진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영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있지 않지만 환청과 같이 어림짐작할 수 있는 메타포가 존재하는데요. 혹시 영지라는 캐릭터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환청과 같이'라는 표현이 정말 좋네요. 기쁩니다. 사실 영지가 테이프를 꺼내 듣는 순간 그 소리들이 다 영지의 뇌리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연출하고 싶었거든요. 의도를 알아주신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영지는 부모를 조금은 비극적으로 잃었습니다. 가정 경제의 문제도 겪고, 학교에서도 교우관계나 학업... 이런 부분의 문제가 있었고요. 그리고 어릴 적 종교 강요의 문제도 겪었어서 심리적으로 잠재적인 불안 요소를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부모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나 있었을지. 날이 서 보이는 이유는,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연성에 측면에서 많은 분들이 약점으로 지적하시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 설명하는 것은 이미 단편 영화의 범주는 넘어서는 거라고 생각해서 생략했습니다.





영화를 촬영할 당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이나 인상 깊게 남은 촬영 장면이 있나요?

차 안 장면을 렉카를 불러서 촬영했습니다. 사실 적은 예산에서 부담이 가는 촬영이었는데다, 스태프 수도 적어서 제가 직접 녹음 장비를 설치를 하는 등의 수고가 좀 들었죠. 장면 자체는 계획했던 시간보다 더 빨리 찍긴 했지만, 조금은 지쳤던 기억이 나네요.


아직도 인상이 남아 있는 장면은 두 가지인데, 사기꾼과 만나 도망치는 장면과 엔딩 씬에 들어간 실제 폐차 장면이에요. 영지와 수미가 차로 도망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수미 역할의 이주영 배우는 면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역 운전자를 써야 했는데, 마침 대학원에 같이 다니던 김병준 감독님이 운전 스페셜리스트 셔서 기꺼이 대역을 해주셨어요. 롱 쇼트로 찍었기 때문에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차량에 타고 있던 영지와 운전대를 잡은 김병준 감독님은 무슨 액션 영화 찍는 것 같았다며 재미있어했었어요.


실제 폐차 장면은, 소품으로 쓴 '99년식 아반떼' 차량을 실제로 폐차를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 짓눌리고 있던 차량이 우리가 의뢰한 그 차량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모든 부품이 다 뜯어져 나가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 있는 상태의 차량들이 줄줄이 그 기계로 들어가 압축이 되는 과정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완전 납작하게 압축이 되어가는 과정을 오래 지켜보고 있으니, 모니터를 지켜보는 제 마음이 영지의 그 마음인 양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편집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해요.





감독님께서는 영화감독뿐 아니라 다양한 결의 직업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독립단편영화의 감독으로서 감독님이 단편영화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으신지. 감독님이 가진 많은 커리어들 중 독립단편영화의 감독의 매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 역시 무겁게 다가옵니다. 저는 생계를 위해 다양한 영상 작업을 하며 살고 있고, 아마 당분간은 이런 일을 하면서 살 것 같아요. 광고나 웹드라마, 유튜브 콘텐츠 등 가리는 것 없이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 가운데 단편영화 작업은 생계와 완전 무관하게 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순수한 창작의 작업이기 때문에 광고처럼 광고주 핑계를 댈 일도 없어요. 오롯이 제가 이 작업의 무게를 다 가지고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단편영화라는 포맷으로 제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는 아직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내가 향후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져야 하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계속 일깨워주는 작업이 단편 작업인 것 같아요. 앞으로 또 어떤 포맷으로 제가 새로운 창작을 내놓게 될지 인생 전반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단편에서만큼은 제가 바라보는 세계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남은 인생은 길고, 제가 단편을 더 찍을지 아닐지는 모릅니다. 다만 다음 단편 작업을 또 하게 된다면 이 전의 작업들에서 겪었던 감정들이 좀 더 응축이 된 걸 내놓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과 마음을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전하는 것부터 시나리오 작업, 촬영, 편집에서의 제 선택들이 다 자연스러운 작업... 언젠가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에게 ‘단편 영화’란 무엇인가요?

편의 서사는 다른 영상 포맷과 달리 조금 더 시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시 중에서도 산문시에 해당한다고 느끼고 있구요. 몇 페이지, 혹은 책 한 분량 정도 되는 서사시와 달리 산문시는 어떤 테마를 압축적이고 또 때론 부연 설명과 개연성이 없이도 시적인 연결성을 지니는 형태가 많죠. 단편 영화는 이런 산문시의 특성과 닿아 있는 것 같아요. 10번 질문의 '단편 영화의 매력' 과도 결이 닿는데, 단편영화는 제게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아주 작고 소소한 단면을 보여주면서도, 그 장면들 속에 든 상징과 메타포들은 복합적이라 많은 생각을 줄 수 있기도 하고요.


말이 길어지네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역으로 묻고 싶습니다. 단편 영화라는 건 무엇일까요? 철학적으로 무엇인가, 영화 산업에서의 위치는 무엇인가...  짧게 답하긴 어려운 질문인 거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감독님은 역으로 물었다. 단편영화란 무엇인가.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단편 영화는 인생의 아주 작고 소소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면까지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단편영화는 관객들에게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장르이며, 창작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써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 <99년식>에서는 초보 모험가와 베테랑 모험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여정과 연대를 볼 수 있어 매력적이며 폐차 신과 같은 연출을 통해 창작자의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이김홍래 감독과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매력을 배로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어 - 인디매거진 숏버스 백승훈, 임소월 코디네이터
인터뷰이 - 이김홍래 감독




작가의 이전글 인물의 '숨'을 쉬며 살아가는 배우 '이주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