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심쿤> - 김재영 감독
눈 밟는 소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나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큼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소복히 쌓일 만큼의 눈이 내려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밟지 않은 눈이어야 한다. 주위가 시끄러워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도 아니니 이른 아침이나 밤 늦게, 혹은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곳에서만 들을 수 있다. 이런 조건이 맞춰지면 뽀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의 질감이 발을 타고 올라오고, 돌아보면 깨끗한 눈바닥에 내 발자취만 오롯이 담겨 있다. 쉽게 들을 순 없지만 귀를 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리다.
‘심쿤’이라는 별명에 맞게 태희의 목소리는 꼭 눈 밟는 소리 같다. 자칫하면 들을 수 없을 뻔 했던 소리. 아버지가 태국인인 다문화가정 아이 태희는 부모님을 잃었으며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다. 처음 사건이 입건되었을 때 태희는 정황을 묻는 순경의 물음에 회피로 일관한다. 상처가 많은 태희는 자신을 향한 괴롭힘이 쉽게 해결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세 명의 가해자 아이들의 목소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와 같다. 뒤에서 들려오면 화들짝 놀라 피하게 되는, 나를 쉽게 움직이게 만드는 크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 이런 소리는 종종 진실을 가린다. 처음에 형사를 속게 한 것도 가해자 아이들의 거짓말은 눈 밟는 소리와는 달리 너무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순경은 눈 밟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의 공감과 관심은 태희의 마음을 열기 충분했다. 순경은 자신의 학교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으며 태희를 이해할 수 있음을 밝힌다. 태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태희가 찍은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충분히 귀를 기울였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태희는 피해 사실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확실한 증거가 되는 동영상을 내어놓기까지 했다.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학교폭력 사건을 종결지은 것이다.
세상에는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도 있다.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순경의 관심이 오랜 괴로움으로부터 태희를 구해준 것처럼, 약간의 노력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아직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며 길바닥에 쌓인 눈들이 많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란다.
인디매거진 숏버스 객원필진 3기 제갈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