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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매거진 숏버스 May 10. 2021

아이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엄마의 잔혹 동화

단편영화 <레퀴엠 포 허스토리> / 강민지 감독


<레퀴엠 포 허스토리>를 보고 있는 내내 안개가 자욱한 외로운 벚꽃 나무 가로수 길에 옅은 분홍 꽃잎이 허망하게 날리다 바닥에 떨구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화려한 미장센과 극단적인 색채감, 감독이 고심 끝에 준비했을 개성 넘치는 소품과 의상, 여러 나라의 언어가 혼합된 통일되지 않은 배우들의 대사가 스크린을 어지럽히며 기괴한 느낌을 더하지만 낯설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누군가는 한 번쯤 겪어 보았을 혹은 겪고 있을 성장 이야기를 벚꽃잎 봉우리가 부풀어 터지기 직전처럼 아슬아슬하고, 몽환적인 영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어릴 적 당신의 꿈, 혹은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란 교육 과정을 마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부모님의 관심과 간섭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넌 무엇이 되고 싶니?”보다는 “ 넌 무엇이 되어라.”가 더 익숙한 우리이다.




요즘이야 과거보다 장래 희망의 폭이 넓어졌다고 하지만, 늦은 밤 발걸음이 닿는 대로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 때는 학원가를 지나게 되는데 어두운 밤 눈부신 화려한 간판 아래 수많은 학원 버스보다 더 많은 승용차를 보게 된다. ‘실제로 보면 그야말로 장대한 광경이다.’


차 안에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많은 학부형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가 대학에 가는 것인지 부모가 가는 것인지.’ 혼동이 올 지경이다. 학원 수업을 마치는 긴 공백을 핸드폰을 보며 무료하게 보내는 엄마들은 그 시간에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저렇게까지 해서 좋은 대학에 내 자식이 입학한들 그건 그 아이의 삶이지 자신의 삶이 될 수 없다.


그러함에도 많은 부모가 좋은 학군을 따지고 자녀의 미래에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필자가 느낀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자식의 미래에 부모가 바라던 삶이 담겨 있는 것은 진실이다. 부모 중에서도 특히 엄마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애착과 집착이 큰 경우가 많다. 엄마라는 존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빠보다는 뱃속에서부터 시작해 아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부분적인 예를 들자면 부부가 같은 대학 혹은 같은 회사에 다녔다고 가정해 보자.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여성들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아이가 적절하게 성장할 때까지 육아에 전념하고 애를 돌보며 살림을 하는 동안 회사에서 오직 자신의 업무를 해 나가며 작든 크든 성과를 내고 있을 남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뒤처지는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이 때론 끔찍할 것이다.



아이를 누군가(보모나 어린이집)에게 맡길 수 있을 나이가 되어 다시 취직이란 것을 해보려 할 때는 이미 자신의 경력은 단절되어 있고 모호한 시점에서 사회 초년생을 다시 겪는 샘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게 아이는 또 성장하여 학업에 신경 써야 할 나이가 되면 이제 여성은 자신의 커리어나 꿈꾸던 미래는 사치가 되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마치면 차에 태워서 학원으로 데려다주고 수업을 마칠 동안 집으로 오고 가는 게 버거우니 자신의 차 안에서 게임을 하거나 다른 이들의 sns를 구경하는 등 지루함을 달래고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몇 달 전 대학 동기의 전화를 받았다. 그 친구가 가정을 꾸리고 출산을 하게 되며 아주 오래간만의 연락이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는 평범한 안부 인사에 ‘울컥’ 서러운 듯 친구는 감정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쌓였었는지 눈물 콧물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죽어라, 공부해서 K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을 때 나는 지금 내 나이쯤에는 명품 힐 신고 출근해 대리석 복도 걸으며 멋지게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남편 출근시키고 애 유치원 보내고 청소, 빨래하다 애 데리러 가고 유치원서 보낸 알림장 보고 다음 날 가져갈 거 준비하고, 숙제 봐주고, 다시 밥하고 애 씻기고 매일 같은 반복이야. 우리 엄마가 나 이렇게 살라고 없는 살림에 과외 시키고 학원 보내고 뒷바라지하신 거 아닌데. 나는 엄마처럼 자식의 성공만 바라보고 살고 싶지 않았는데 거울을 보니 겉모습도 생각하는 것도 내가 엄마 그대로다.”


내 친구의 어머님은 딸이 경영대를 졸업해 옛말처럼 훌륭한 인물이 되어 ‘금의환향’해 어머님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을 풀어 줄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여전히 한국 부모가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장래 희망의 1순위는 좋은 대학 좋은 과에 보내는 것과 졸업 후 그와 관련된 직업을 갖기를 원하는 건 바뀌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사실 성적이 좋은 자녀를 둔 부모가 법조인이나 의사, 교육자, 연구원 혹은 공무원이 되라고 말하는 집안은 많아도 그 아이가 설계하고 있을 미래나 꿈을 묻고 지원해 주는 부모가 확연하게 적은 확률인 것은 확실하다. 내 삶을 희생해서 키워낸 내 자식에게 적당한 관심과 간섭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적당한 간섭과 관심이 집착과 강요로 바뀌었을 때 자칫 잘못하면 잘 성장할 수 있는 아이 위에 두꺼운 콘크리트를 부어 질식사시킬 수도 있다.




필자가 하는 이야기가 세상 모든 부모와 세상 모든 기혼 여성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레퀴엠 포 허스토리’ 를 보면 유리는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엄마가 바라는 모습과 거리가 있고 그런 엄마의 강압 속에서 아이는 변형되어 간다. 필자에게는 그런 아이의 안타까운 모습보다 끊임없이 기괴한 말로 떠들어 대는 엄마가 더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그녀의 속마음은 딸 유리를 자신이 원하고 모습으로 키우는 것보다는 스스로가 유리와 같은 나이로 돌아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나이를 먹는 것과 죽음이 순리이기에 자손을 생산하는 것이고 신이 아닌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내가 바라던 모습을 아이에게 투영하고 강요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유리의 엄마가 브러쉬 빗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빗다가 빠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모아 뺨에 가져다 보듬는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 그 모습에서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노화 진행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애착과 슬픔으로 받아들여졌다, 누구나 어린, 그리고 젊은 시절이 있고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시절로 다시 가 바로잡고 싶은, 혹은 이루고 싶은 무언가를 가슴 한쪽에 모두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인간의 마음이 탄생시킨 환상 속의 기계가 타임머신 아니던가.



이 영화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아이에 대한 엄마의 욕망과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을 변형, 희생해서라도 자유로운 영혼을 택하는 어린 딸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포커스도 어린 딸 유리에게 맞춰져 있고, 표현주의와 판타지적 요소가 가득해 얼핏 보면 ‘잔혹 동화’ 같은 느낌도 있지만, 필자는 말하고 싶었다. 신이 정한 삶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한 여자의 어긋난 발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담을 붙이자면 세상 모든 약한 생명을 학대하는 것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행위이며 이 영화를 볼 당신은 필자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시선을 찾아내기를 기대해본다. ‘벚꽃의 만개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그 시기가 너무도 짧고 그래서 인간은 봄의 절정에 다시 만개할 벚꽃과 마주하기를 기다린다.’ 필자 역시도.



인디매거진 숏버스 이신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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