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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민 Oct 17. 2024

31.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교집합을 찾아서

중용 제1장의 마지막 문장이 바로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입니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길러진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을 반대로 해석해 보면 중화(中和)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하늘과 땅이 뒤집어져 만물이 제대로 자라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중화(中和)를 이룬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니 우리들 소인배(小人輩)들은 하늘과 땅이 뒤집어져 만물이 제대로 자라날 수 없는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일한 시공간(視空間)에 살고 있어도 군자는 하늘 아래 땅 위에 똑바로 서서 살아가는 반면 소인(小人)들은 물구나무 선 채 거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공자와 동일한 가르침을 펼칩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반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열반의 경지에서 청정(淸淨)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도 동일합니다.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74억의 인구가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천국에서, 어떤 사람은 지옥에서, 어떤 사람은 그 중간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스승들의 삶과 가르침의 교집합 내에서도 매우 중요한 원소입니다. 


중화(中和)를 이룬다는 것이 어떤 경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중용 제1장은 중(中)과 화(和)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中)이란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현되지 아니한 상태를 말하고, 화(和)란 이러한 정(情)이 나타나되 상황에 딱 맞게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표출된 상태를 말합니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로애락미지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군자는 평소에는 중(中)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어떤 상황에 처하면 그 상황에 딱 맞는 정도의 감정을 발합니다. 반면 우리 소인들은 평소에도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중(中)의 상태를 벗어나 있다가 어떤 상황에 처하면 너무 밋밋하거나 오버해서 감정을 표출하기 일쑤입니다. 지나고 나면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중(中)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고, 화(和)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중(中)에 치중하다 보면 화(和) 하기 어렵고 화(和)에 치중하다 보면 중(中) 하기 어려우니 중(中) 해야 할 때 중(中)하고 화(和) 해야 할 때 화(和)한 다는 것은 대단한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중용은 중(中)을 천하의 대본(大本)이라고 하고, 화(和)를 천하의 달도(達道)라고 표현합니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누가복음 17장 20-21절). 또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말합니다(누가복음 9장 27절).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이지만 죽기 전에도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예수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합니다(요한복음 8장 31-32절).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는 원죄(原罪)로부터 벗어난 절대 자유의 경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원죄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게 되면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중요의 말씀과 비슷한 맥락의 말씀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예수 재림 이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하늘과 땅이 펼쳐진다는 의미이지만, 원죄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기존의 하늘과 땅에서 벗어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하게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인류의 스승들은 동시대인들과 철저하게 함께 살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을 체험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스승들처럼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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