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교집합을 찾아서
불교 교리에 의하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열반(涅槃)에 이를 것이 약속된 정정취(正定聚), 반드시 지옥 등의 악도(惡道)에 떨어질 것이 정해진 사정취(邪定聚), 이도 저도 정해져 있지 않은 부정취(不定聚)가 바로 그것입니다. 정정취, 사정취, 부정취를 합하여 삼정취(三定聚)라 합니다.
정정취(正定聚)는 석가모니가 진리를 설하거나 설하지 않거나 언젠가는 반드시 깨달음에 도달할 사람입니다. 반면 사정취(邪定聚)는 석가모니가 아무리 진리를 설하더라도 결코 깨닫지 못할 사람입니다. 부정취(不定聚)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들으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해 악도에 떨어질 사람들입니다. 36세에 대각(大覺)을 이룬 석가모니가 80세까지 세상을 돌아다니며 설법을 한 이유는 부정취(不定聚)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독교에도 이와 비슷한 교리가 있습니다. 바로 예정론(豫定論)입니다. 예정론이란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으로 나누어 미리 정해두셨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중(二重)예정론이라 합니다. 이중예정론(二重豫定論)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장 4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로마서 9장 11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로마서 9장 18절)”.
예정론에 반대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바로 구원보편론(救援普遍論)입니다. 구원보편론은 구원 또는 멸망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원보편론은 다음 성경 구절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장 7절),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에스겔 33장 11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디모데전서 2장 4절),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1서 2장 2절)”.
이중예정론과 구원보편론 모두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성경 말씀을 모두 포섭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이중예정론과 구원보편론을 통합하는 이론으로 삼중예정론(三重豫定論)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삼중예정론은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반드시 구원받을 사람, 구원받지 못할 사람, 구원 여부를 확정 짓지 않은 세 부류로 예정하셨다는 입장입니다.
성경 속 인물들 중에는 날 때부터 구원이 예정되어 있던 사람도 있고 멸망이 예정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성령충만했던 세례 요한은 전자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후자에 속합니다. 하지만 대다수 인물들은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울 왕은 성령을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인해 끝내 구원받지 못하였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성취해 냅니다. 이처럼 성경적으로 보더라도 이 세상에는 정정취, 사정취, 미정취의 세 부류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신명기 12장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26-28절)’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정정취, 사정취 보다는 미정취가 훨씬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불교의 삼정취(三定聚)와 기독교의 삼중예정론(三重豫定論)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