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6,7
5-4.
디에고는 어둡고 혼탁한 도시 뒷골목에 숨어 있었다. 중남미의 범죄 도시, 좁은 골목은 담배 연기와 쓰레기 냄새로 가득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매일을 관통했다.
디에고가 검은 재킷 안에 권총을 숨기고, 오토바이 헬멧을 눌러쓴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 오늘도 ‘일’이 있다. 누군가를 감시하고, 위협하고, 필요한 경우엔 손을 더럽혀야 한다.
휴대폰 진동. 익명의 메시지 하나.
“아이를 데려온다. 준비해.”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계획에 없는 변수, 예측 불가능한 존재. 그러나 그는 감정을 차단한 채 헬멧을 쓰고 골목 입구로 향했다.
몇 분 뒤, 멀리서 다가오는 그림자. 작은 발걸음, 다리에 힘이 없는 듯한 아이 하나가 어른에게 이끌려 온다. 아이는 열 살쯤 되어 보였다. 말이 없고, 눈빛은 초점을 잃은 채였다.
디에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아이만 무사히 넘겨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의 임무는 끝났다. 하지만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작은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형.”
그는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가 다시 말한다.
“왜, 나랑 똑같이 생겼어?”
그제야 디에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동자. 형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그 눈과 똑같은 색. 디에고의 안에서 무언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때, 누군가 총을 꺼내들었다. 거래 현장을 노리고 있던 다른 조직이었다. 총성이 울렸다. 디에고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껴안고 땅에 눕혔다. 뒤엎인 순간, 그의 손에 피가 묻었다.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대신 맞았다. 그 아이를 데려온 어른.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안고 있다가, 디에고를 덮치려던 총탄을 대신 맞은 것이다. 디에고는 얼어붙은 채, 피투성이가 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속삭인다.
“얜… 널 믿었어. 그러니까… 부탁해…”
숨이 끊어진다. 그 순간, 디에고의 눈앞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사라진 형. 버려졌던 자신. 그리고 지금, 아무 조건 없이 자기를 믿고 누군가를 지켜낸 사람.
그는 처음으로,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며 떨기 시작했다. 그토록 경멸하던 감정의 무기력. 그러나 지금은 무기력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견고한 벽이었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아이의 쪽지 하나. 구겨진 종이 안에 삐뚤한 글씨.
“형, 날 버리지 마.”
디에고가 종이를 주어 살펴본다. 종이 질감이 이상했다. 범상치 않게 오래되어 보이는데, 방금 꺼낸 듯 깨끗했고…
글씨는 분명히 삐뚤빼뚤한 어린아이의 것이었지만, 디에고는 왠지 그 필체를 기억하고 있었다.
“형, 날 버리지 마.”
이 문장은 과거 디에고 자신이, 형에게 썼던 말이었다.
기억 저편, 경찰서 앞에서 며칠을 기다리던 어린 날. 손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에, 형에게 건네지도 못하고, 주머니 안에 구겨 넣은 채 잃어버렸던 쪽지.
디에고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그는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무표정하지만, 묘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디에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존재처럼. 그 순간, 그의 뇌리에 어릴 적 형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디에고… 누가 뭐래도, 넌 사람이다. 절대 그걸 잊지 마.”
하지만 디에고는 그 말을 잊고 살았다. 인간이길 포기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그 잊었던 말이 아이의 눈빛과 손글씨를 통해 되살아난 것이다. 디에고가 아이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며 처음으로 말을 건넨다.
“…너, 이름이 뭐니?”
아이의 눈동자가 빛난다. 디에고는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총성을 외면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간다. 무언가가, 지금 막 시작되었다.
5-5.
케빈이 고요한 실험실 한가운데 서 있다. 뉴욕 근교의 기밀 연구소.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 스크린에는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흘렀고, 케빈의 손목엔 동기화된 인공지능 모듈이 반응하고 있다.
그는 수년 간 인간 행동 예측 모델을 개발해왔다. 감정, 무의식, 비효율성—모두 제거하고, 인간의 선택을 수식으로 환원시키는 작업.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그의 전부였다.
오늘, 그는 마지막 알고리즘을 테스트 중이었다. 실험은 완벽했다. 예측 정확도는 99.998%.
단 하나, 마지막 피험자 ‘X-07’의 행동만이 시스템에서 계속 오류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왜 저 피험자만 예외지…?”
케빈은 반복 분석에 들어갔다. 조건은 동일했고, 환경 변수도 통제되어 있었으며, 입력된 경험 데이터도 완전했다.
그러나 X-07은 "의미 없는 선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해진 최적 해를 두고, 감정적으로 손해 보는 선택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크린이 갑자기 흔들렸다. 전자적 이상. 오류 로그가 넘쳐나기 시작하고, 마치 시스템 내부에서 누군가 개입하는 것처럼 코드들이 변경되고 있었다.
"…이상하다."
케빈이 곧바로 시스템을 오프라인으로 전환하고, 메인 서버에 접속한다. 그런데—기록에 없는 디렉토리가 나타났다.
디렉토리명: HEART.LOGIC.BREAK
접속하자, 영상 하나가 자동으로 재생된다.
고화질도, 분석영상도 아니다. 오래된 VHS화질의 홈비디오였다.
어린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엄마에게 질문을 던진다.
“엄마, 사랑은 왜 수학으로는 설명이 안 돼?”
그 질문에, 화면 너머 여인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건 네가 수학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야, 케빈.”
그 순간, 케빈의 동공이 흔들린다.
화면의 소년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 기억은 잊고 있었다.
그는 그 영상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병으로 돌아가셨고, 영상은 남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누가, 어떻게 이걸 시스템 안에 넣었을까?
그 순간, 그의 손목에 착용된 인공지능 모듈이 자율적으로 진동한다.
그 안에서, 이전엔 없던 짧은 문장이 출력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케빈이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본다.
시스템은 믿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의도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실험을 통제하던 자가, 실험 대상이 된 기분.
그의 손이 천천히 떨린다. 그리고 스스로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인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갑자기 실험실 전체의 조명이 꺼지고, 비상등만이 붉게 켜진다. 통제된 공간이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처음으로 두렵지 않았다.
스크린은 꺼졌고, 시스템은 멈췄다. 대신 그의 눈앞엔 하얀 화면 하나만이 떠 있었다.
그 안엔, 단 하나의 질문이 깜빡이고 있었다.
“케빈, 만약 네가 틀렸다면?”
그가 오래도록 화면을 바라본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처음으로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답을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질문을 적기 시작한다.
“사랑은, 왜 계산할 수 없을까?”
“왜 어떤 사람들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누군가를 지킬까?”
“왜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걸까?”
케빈이 손등으로 눈을 닦는다. 눈물은 낯설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었다.
논리는 무너지고 있었고,
그 잔해 속에서, 케빈의 인간성이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5-6.
린이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교내 게시판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어디를 봐도 질서정연했다. 교복의 주름, 신발의 각, 걸음걸이의 간격까지. 학생들은 기계처럼 조용히 오가며,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말은 사라졌고, 표정은 훈장처럼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시집 한 권. 누군가 교복 주머니에 몰래 넣어준 책이었다. 제목은 지워졌고, 표지는 찢어져 있었지만, 속의 문장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나는 부르지 못한 이름을 위하여 입술을 다물었다.”
그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린이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 조심스레 책을 덮는다. 검열 카메라가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책을 재빨리 가방 속 깊은 곳에 감추고, 천천히 복도를 지난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지만, 그 어디도 목적지는 아니었다. 단지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침묵이 너무 오래 그녀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교정 끝의 오래된 기숙사 건물 뒤편, 폐쇄된 옥상 계단이 있었다. 금지구역. 출입 통제. 그러나 린은 문 앞에 멈춰 선다. 철문은 잠겨 있었지만, 바닥에 작은 틈이 있었다. 누군가 종이를 밀어 넣은 흔적처럼.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조심스레 그 종이를 끄집어낸다. 접힌 종이. 펼치자, 그 안엔 잉크가 번진 채로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를 지켰다
그러나, 말해도 되는 날이 오면
나는 반드시 시로 말하리.”
그 문장은 린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 시, 그녀가 쓴 것이었다. 하지만, 제출하지 못한 채 버렸던, 그 날 밤의 시. 혼자 방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썼고, 다음 날 아침, 겁이 나 휴지통에 찢어 넣었던 그 시.
“어떻게 여기에…?”
그녀는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속삭인다.
“누가… 나를 본 거야?”
그 순간, 아무도 없는 계단 아래쪽에서 희미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소리를 담고 있었다.
― 린, 너는 사라진 적 없어.
목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문장은 들렸다. 마음으로. 기억으로. 영혼으로.
린은 종이를 가슴에 껴안고 천천히 일어선다. 처음으로, 금지된 그 철문 앞에서 두드려 본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문이 열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 열리는 건 린의 내면, 닫혀 있던 목소리였다.
그녀는 다시 복도로 돌아간다. 단속 카메라가 지나가도 피하지 않는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 책상 서랍을 열고, 오래전 감춰두었던 흑백 노트를 꺼낸다.
표지를 넘기고, 펜을 든다. 그리고 적기 시작한다.
“내 안에 갇혀 있던 시가 다시 숨을 쉰다.
침묵은 끝났다. 이제는, 말할 것이다.”
린의 눈빛이 바뀐다. 미세하지만, 확실히.
그녀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쓰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질문을.
그리고, 그것은 시작이었다. 보호란, 때로는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되찾는 것. 린은 지금, 그 문턱에 서 있다.
5-7.
마리사가 언제나처럼 오래된 우물 옆에 앉아 있다. 아프리카 남부의 작은 마을. 낮은 지붕들, 먼지 낀 하늘, 갈라진 땅.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장터의 웅성임도 그곳까진 닿지 않았다.
우물은 말이 없었다. 그녀도 말이 없었다.
말하지 않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었다. 말을 하면 문제를 일으킨다고 배웠고, 질문은 복종의 반대말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마리사는 입을 닫은 채 자라났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천조각이 쥐어져 있다. 구호단체에서 나눠준 헌 옷 조각이었다. 누군가 옷자락에 꿰매 넣은 단단한 자수 글씨가 있었다.
"Let your voice be heard."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마리사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내 목소리’라는 개념조차 생소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은 그녀 안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날, 우물 안을 내려다보던 마리사는 문득 바닥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햇빛이 쏟아지며 우물 안 돌틈 사이로 비치는 얇은 금속판.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지…?"
마리사는 조심스레 두레박을 내려 그 물건을 끌어올렸다. 물에 젖은 낡은 양철 상자 하나. 그녀가 천천히 뚜껑을 연다. 안에는 누군가 접어 넣은 종이 조각들과 작은 연필이 들어 있다.
첫 번째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다.
“세상은 너의 침묵에 익숙해졌지만, 하늘은 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마리사의 손이 떨린다.
두 번째 종이를 펼친다.
“마리사, 너는 말할 수 있어. 너의 이야기를 써도 돼.”
그 문장은 그녀의 내면 어딘가를 찔렀다. 누군가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너무 생경했다. 이 마을에서, 누구도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 이름은 신분 있는 자의 것이었고, 그녀는 단지 ‘그 아이’, 혹은 ‘그 조용한 아이’였다.
그 순간, 우물 안에서 잔잔한 물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희미하게… 아주 작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말해, 마리사. 나 여기 있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비가 오려는 듯 구름이 몰려든다. 그러나 우물가엔 바람 한 점 없다. 사람도 없다. 그런데… 무언가 있다.
마리사가 양철 상자 안의 종이들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쳐 놓는다. 그리고, 마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연필을 잡는다. 처음 써보는 글자.
손은 서툴렀고, 글씨는 삐뚤었지만, 그녀는 한 단어를 적는다.
“있어요.”
그 한 단어.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말로 드러낸 순간.
그녀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보다 먼저 온 것은,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입을 닫은 채 자라온 모든 시간들이, 이제야 허락된 말 한마디로 뚫려 나오는 듯한 해방감.
그녀는 종이를 한 장 더 꺼내 적는다.
“나는 여기에 있어요.”
그 순간, 마을의 종탑에서 갑자기 종이 울린다. 예정된 시간도 아니고, 아무도 줄을 잡지 않았지만… 종은 분명히 울렸다.
‘누군가 들었다.’
마리사는 느꼈다.
말을 했다는 것.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그녀가 상자 안의 종이들을 가슴에 품고, 우물가에서 일어난다.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다시 말할게요. 계속 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