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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지민이 낡은 고시원 방에 가만히 앉아 있다. 조명은 꺼져 있고, 창문은 검은 천으로 막혀 있다. 책상 위엔 오래된 수험서, 찌그러진 라면 컵, 그리고 열지도 않은 취업 공고 목록이 놓여 있다. 벽 한쪽엔 달력. 오늘 날짜는 빨간 펜으로 X표시가 되어 있다.
지민이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간다. 건물 꼭대기, 마지막 층계참. 옥상으로 이어지는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지민이 문고리를 잡아보지만 돌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멈춘다. 이 문 너머가 끝인 듯 느껴졌으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열려야 할 건 문이 아니라, 내 안이라는 걸… 그는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손에는 편지 한 장. 어릴 적 엄마가 남긴 흔적 같은 편지다.
“지민아, 세상이 아무리 차가워도 너만은 따뜻한 아이로 남았으면 좋겠구나…”
지민은 천천히 편지를 구겨 손에 쥐고, 고개를 숙인다. 아무런 말도 없다. 눈물도 없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이 고장 났음을 느낀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울림이 시작된다.
― 움직여.
낯선 목소리. 그러나 무섭지 않다. 오히려 낯익은 느낌. 꿈속에서 들었던 듯한,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켜보던 존재의 음성 같다.
지민이 고개를 든다. 눈앞엔 그대로 어두운 계단과 벽뿐이다. 그는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여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방으로. 다시 책상 앞.
그가 책상 서랍을 열자, 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노트 하나가 떨어진다. 표지엔 글자가 없다. 손에 잡힌 노트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 방금까지 쥐고 있던 것처럼. 그러나 방엔 아무도 없다. 지민이 노트를 펼치자 그 안에는 누군가 써둔 문장이 반복되어 있었다.
“질문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살아 있으려면, 물어야 한다.”
지민의 손이 떨린다. 그는 입을 열어 혼잣말처럼 말한다.
“나는… 왜 살아 있는 거지?”
그 순간, 방 안 공기가 미세하게 떨린다. 전자기적 이상도 없고, 창문도 열려 있지 않다. 그러나 마치 어떤 회로가 켜진 듯,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 흐름이 시작된다. 막혔던 감정의 회로, 닫혀 있던 질문의 문.
그리고 그가 노트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한 문장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지민, 넌 아직 끝나지 않았어.”
놀랍게도, 그 문장은 그의 필체였다. 언제 썼는지도 모를, 그러나 분명히 자기 손으로 적은 문장.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들이쉰다.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5-2.
나딤이 폐허가 된 건물 틈에 몸을 숨기고 있다. 먼지와 화약 냄새가 가득한 공기. 바깥에서는 드문드문 총성이 울리고, 멀리서 굴러오는 탱크 바퀴 소리가 진동처럼 땅을 흔든다.
그의 손에는 낡은 권총이 쥐어져 있다. 방아쇠는 거칠고, 총구는 닳아 있다. 누구에게 겨누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쥐고 있는 도구.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최후의 안전장치.
그의 눈은 공허했다. 마치 모든 감정을 잠궈버린 듯.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무엇인가 흘러내린다. 돌가루? 아니, 한 장의 낡은 종이. 경계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바람 한 점도 없었다. 그런데도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
나딤이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든다. 종이엔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다. 폭격이 일어나기 전의 거리 풍경. 아이들이 웃고 있고, 나무에는 감이 열려 있다. 한가운데에 어릴 적 자신의 얼굴을 닮은 소년이 서 있다.
그 아래, 한 문장이 삐뚤삐뚤하게 적혀 있다.
“나딤, 넌 계속 도망쳐 왔지만, 나는 네 곁에 있었다.”
나딤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남긴 쪽지에 쓰여 있던 바로 그 말. 하지만 그 종이는… 집이 무너질 때 함께 사라졌었다.
“이건… 말이 안 돼.”
그 순간, 그의 머릿속 어디선가 메아리 같은 속삭임이 들린다.
― 믿어도 된다.
정지된 시간. 바깥의 전쟁 소리도, 내면의 불신도 모두 멎은 듯한 정적. 나딤이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다시 펼쳐 본다. 이번에는 문장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아도 돼.”
순간, 무너진 건물 너머로 햇빛 한 줄기가 파고든다. 칙칙했던 벽면에 그 빛이 정확히 종이 위로 내려앉는다.
나딤은 처음으로, 총을 내려놓는다. 폐허 속이지만, 그의 내면에서 아주 미세한 ‘신뢰’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가 자신을 지켜보았고, 이해하고 있었다는 가능성. 그것은 새로운 회로였다. 살기 위한 도망이 아닌, 살아가려는 방향을 찾아가려는 첫걸음.
5-3.
소피아가 파리 외곽의 고급 주택 단지 안, 14층 펜트하우스의 창가에 서 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정원은 완벽하게 가꾸어져 있다. 분수는 시간에 맞춰 솟아오르고, 나무들은 균형 잡힌 가지치기 끝에 마치 설치미술처럼 서 있었다. 고요한 우아함. 그러나 그 안엔 생기가 없었다.
소피아는 수십 번 그 창가에 서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름다움은 늘 곁에 있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뒤쪽 거실에는 수십 권의 철학 서적이 늘어져 있다.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사르트르… 모두 그녀가 한때 감정이라는 걸 찾아보려 애쓰며 펼쳐본 책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책들은 반쯤 덮여 있고, 한 권도 끝까지 읽히지 않았다.
소피아가 테이블에 놓인 크리스털 잔을 들어 올린다. 고급 와인. 혀끝에 감미로운 산미가 닿지만, 그녀는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입안에서 사라지고, 아무 감각도 남지 않았다. 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그녀가 중얼거린다.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거지…”
그 순간, 눈길이 창틀 위 작은 책 모형에 머문다. 평소에는 장식으로만 생각했던 그 작은 책. 오늘 따라 그 책의 모서리에서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것을 꺼냈다. 한 장의 엽서. 표지는 바다와 노을, 그리고 희미한 뱃머리가 담긴 이미지. 뒤를 돌려보니 손글씨로 적힌 문장이 있다.
“소피아, 네가 무뎌진 게 아니야. 너무 오래 외면한 거야. 감각은 여전히 네 안에 있어.”
그녀가 엽서를 내려다본다. 갑작스럽게 코끝이 찡해진다. 익숙한 문체. 마치 과거의 자신이 써둔 일기에서 본 듯한 문장.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다.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때, 갑작스레 창문 너머에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갈라지듯 빛이 번쩍이고, 곧바로 장대비가 쏟아진다. 유리창을 타고 굵은 빗줄기가 내리친다.
소피아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가, 다시 창에 다가섰다. 처음으로 비의 소리를 의식했다. 그 소리가 귀를 울리고, 그 진동이 유리창을 통해 피부에 닿는다. 지금껏 어떤 음악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살아 있는 소리’.
순간, 엽서 아래에 잉크가 번지듯 문장 하나가 새겨진다.
“감각은 질문으로 깨어난다. ‘나는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가?’”
소피아의 눈에 물기가 맺힌다. 너무도 오랜만의 감정. 그것이 슬픔인지, 안도인지, 그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 무언가가 흘러들고 있다.
그녀는 엽서를 가슴에 꼭 안고, 두 손으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쏟아지는 빗줄기. 차가운 바람.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강한 자극.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는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살아 있는 걸까?”
그 질문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녀는 느겼다. 껍질이 깨어지는 듯한 감각. 무기력의 얇은 벽에 금이 가고, 감각의 회로가 재기동되는 찰나.
소피아가 눈을 감고 빗속에 서 있는 도시를 바라본다. 처음으로, 그 풍경이 조금은 아름답다고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