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4
6-3.
봄비가 내리고 있다. 파리 7구, 정원에는 흰 장미 대신 빗방울이 가득하다. 소피아는 창가에 서서 커튼을 젖히고, 유리창을 통해 떨어지는 물방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창문은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제, 그 창은 세상과 연결된 입구처럼 보였다.
그녀가 책상 앞에 앉는다. 스탠드 아래 펼쳐진 책은 『존재와 무』. 그러나 페이지는 넘겨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 펜이 들려 있고, 한 권의 작은 노트에 문장들이 새겨진다.
“무기력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외면한 것이다.”
“나는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가, 그것이 나의 첫 질문이었다.”
그녀는 그 문장들을 적고, 지우고, 다시 썼다. 하루는 그런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숨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부터 소피아는 학교에서 열리는 ‘철학적 자기탐구’라는 선택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외면하는 수업이었다. ‘비효율적이고, 진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업. 그러나 소피아는 그 수업의 질문지를 받아 든 순간,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당신은 왜 존재합니까?”
“슬픔이 없다면 기쁨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수업은 조용했고, 질문은 많았다. 교수는 정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소피아를 끌어당겼다. 그날, 교수는 수업을 마치며 말했다.
“다음 시간까지, ‘내가 가장 깊이 느낀 질문’을 하나 골라오세요. 누군가의 질문이어도 좋고, 당신 자신의 것도 좋습니다.”
소피아는 그 밤, 수십 개의 질문을 노트에 적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를 남겼다.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그 질문을 들고 다음 수업에 나갔을 때, 강의실은 반쯤 비어 있었다. 교수는 그녀의 질문을 조용히 읽고 말했다.
“이건 철학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그걸 질문했다는 이유로 세상이 당신을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소피아는 웃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그녀는 학과 게시판에 작게 쓴 글을 붙였다. 익명으로. 질문 하나만.
“나는, 느끼고 있는가?”
다음 날,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비웃고 누군가는 욕설을 던졌다.
“또 감성질이야?”
“요즘 이런 애들 보면 피곤하단 말이지.”
“쓸모없는 질문.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된다고?”
소피아는 그 소리를 멀리서 들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걸어가, 그 글 옆에 또 하나의 메모를 붙였다.
“삶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날 밤, 익명의 메시지가 소피아의 학교 메일로 도착했다. 짧은 문장이었다.
“질문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같은 질문을 해요. – R.”
소피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질문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밤. 비가 그친 창가. 그녀는 펜을 들어 노트에 또 하나의 문장을 적었다.
“질문은,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었다.”
순간, 창이 흔들렸다. 그녀가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그러나 책상 위, 닫아 두었던 책 한 권이 열려 있었다. 페이지 중간.
한 문장이 밑줄과 함께 반짝이고 있다.
“나는, 존재하기 위해 질문한다.”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것이 누군가의 대답처럼 느껴졌다.
6-4.
디에고는 오랫동안 그 골목을 다시 찾지 않았다. 그날 총성이 울렸고, 아이를 안고 도망쳤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곳을 외면한 채 다른 구역의 임무로 자신을 밀어넣었다. 더 이상 '아이를 지킨다'는 이유로 감정에 휘둘릴 여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조직의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보호 구역을 접수한다.”
그 말은 곧, 아이들이 숨어 있는 피난처를 '정리'하라는 의미였다. 디에고는 처음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긴… 애들이 있는 곳이야.”
하지만 상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빨리 끝내야지. 감정은 치워. 우린 일하는 거야.”
그날 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옛 쪽지를 다시 펼쳐 들었다.
“형, 날 버리지 마.”
그 문장은 여전히 그의 손을 떨리게 했다. 그는 결정해야 했다.
그날 밤, 디에고는 검은 재킷을 벗었다. 대신 낡은 회색 후드를 입고 골목으로 향했다. 피난처의 문 앞에서 그는 조용히 노크했다. 문이 열리자,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날 안겨 있던, 자신을 ‘형’이라 불렀던 그 아이.
“왔어?”
그 말은 평범했지만, 디에고는 그 안에서 ‘기다렸어’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피난처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아이들이 있었다. 다친 아이, 말이 없는 아이, 서로를 감싸 안고 자는 아이들. 그는 처음으로, 아무런 임무도 없이 그들과 한 공간에 앉았다.
“나, 여기 있으라고 했던 거 맞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따뜻했다. 디에고가 조심스럽게 사탕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네 거야.”
그 순간, 아이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디에고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누군가를 거래 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며칠 뒤, 조직은 그가 피난처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내부 정보 누설, 명령 불복종. 이제 디에고는 도망자가 되었다.
그날 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폐공장을 빠져나왔다. 작은 손들을 하나하나 잡고, 미로 같은 뒷골목을 통과했다. 도중에 총소리가 들리자, 디에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내던져 아이를 감쌌다.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 널 지키는 게 이렇게 쉬운 줄 몰랐어.”
어느 폐건물 옥상. 해가 지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아이들은 잠들었고, 디에고는 그 곁에 앉아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거기엔 익숙한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다.
“디에고, 너는 이제 지키는 자가 되었다. 상처는 흔적이지만, 선택은 너의 것이다.”
그 문장을 보고,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사람 맞네.”
밤바람이 옥상 위를 스쳐 지나간다. 검은 재킷은 더 이상 그에게 필요 없었다. 그 옆에 놓인 총도, 이제는 방어가 아닌 버림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