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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6-5,6

by 강정민

6-5.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은 케빈이, 창문을 통해 노을이 퍼지는 강의동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 하늘은 규칙 없이 물들어갔다. 붉은 색과 주황, 분홍빛이 무질서하게 겹쳤고, 그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아름답다’는 정의는 여전히 그의 공식에 없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책상 위에는 해체된 시계 부품들과 함께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관계는 예측할 수 없기에 진짜다.”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이 남기고 간 말이었다. 케빈은 왜 그 말을 적어 두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 이후 계속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노트북은 여전히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완벽했고, 대부분의 인간 행동은 정밀하게 예측되었다. 그러나 ‘복잡한 선택’ 앞에서, 시스템은 자주 느려졌고, 감정 변수 앞에서는 멈춰버리곤 했다.


케빈이 X-07의 데이터를 열어본다.

의미 없는 손해, 낭비처럼 보이는 돌봄, 자기 희생.

시스템은 오류라고 판단했지만, 케빈은 이제 그것을 ‘고장’이 아니라 ‘가능성’이라 부르고 있다. 그때였다. 누군가 도서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조용한 발걸음.

에린이었다.

그녀는 케빈의 옆자리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때… 실수한 거, 고마웠어요. 그냥… 말없이 복구해줘서.”

케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고마움은 감정인가요, 판단인가요?”

에린은 가볍게 웃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몰라요.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케빈은 무의식적으로 손목의 시계를 만졌다. 여느 때와 다르게 5분이나 예정보다 늦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았다. 변수였지만, 수용 가능한 종류의 변화였다.

“에린 씨는…”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미 없는 선택을 할 때, 후회하진 않나요?”

에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가끔 후회해요. 그런데 가끔은, 그 선택이 나를 지켜줘요. 그래서 계속해요.”

그 말에 케빈은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X-07의 행동 곡선이 떠올랐다. 손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자기 보존의 기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설.


그는 그날, 알고리즘을 수정했다.

“비효율적이지만 지속되는 선택 패턴 — 감정 기반 의사결정 모듈 삽입.”

시스템은 경고 없이 받아들였다. 무언가가 열리고 있었다.


케빈이 책상 위 종이를 다시 집어 든다.

‘관계는 예측할 수 없기에 진짜다.’

케빈은 처음으로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노트북에 문장을 적었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이해하려 하고 있다.”


그 문장을 쓰는 동안, 에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날의 노을은 시스템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케빈의 기억 어딘가엔 분명히 남아 있었다.

6-6.


비가 내리고 있다. 천둥 소리가 가깝다. 린이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빈 강당의 맨 앞에 앉아 있다. 무대 위에는 붉은 깃발이 걸려 있고,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화로운 미래를 위한 백일장 – 충성, 노동, 순결.”


그날은 학교 전체가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주제, 정해진 형식, 정해진 결론. 거기엔 ‘글’이 있었지만 ‘말’은 없었다.


린은 눈을 감았다. 가방 속에 접혀 있는 종이 한 장. 수십 번 쓰고 버렸던 시. 그 시는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 시는, ‘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전, 린은 책상 위에 모르는 필체로 적힌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린, 그 시는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야.”

아무도 보낸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문장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안고 있었던 절규를 떠올리게 했다.


무대에 이름이 불렸다.

“황린 학생, 발표하세요.”

그녀가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간다. 심장이 요동친다. 주최 측에 미리 제출한 글은 따로 있다. 무난하고 모범적인 글.

그러나 지금, 린의 손에는 다른 종이가 들려 있다. 마이크 앞. 청중은 조용했다. 교사, 학생, 장교들까지 모두 그녀의 입을 지켜보고 있다.

“제 시의 제목은… ‘눈 감은 사람들’입니다.”

순간, 모두가 눈을 떴다.


우리는 태어났고

침묵은 우리의 첫 언어였으며

질문은 삭제되었고

눈물은 편집되었다


그러나 밤마다

나는 불을 껐고

어둠 속에서 진짜 나를 썼다


나를 잃지 않으려


오늘 나는 말한다

내 목소리는 작지만

결코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침묵을 버릴 것이다.

나는 사람이다


순간 정적.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누구도 박수치지 않았고,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린은 고개를 들었다. 두려웠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 시는… 제가 처음으로 쓴 ‘제 말’입니다. 저는 더 이상, 없는 존재가 아니고 싶습니다.”

뒤편에서 한 교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승인된 원고가 아니야! 당장 멈춰!”

그러나 이미 린의 말은 끝나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가슴에 꼭 안고 무대를 내려왔다. 사람들은 피하듯 시선을 돌렸지만, 그 가운데, 어떤 학생 하나가 눈을 맞췄다. 그 아이는 조용히 입을 움직였다.

“고마워.”

그 순간 온몸이 떨렸다.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 없었다. 기억은 없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날 밤, 기숙사 침대에서 그녀는 종이에 시 하나를 더 적었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를 향하듯 사인을 남겼다.


“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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