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파리

7-3

by 강정민

7-3.


봄. 파리, 센 강가에 저녁 햇살이 길게 내려앉는다. 강물 위로 금빛 물결이 부서지고, 바람은 겨울의 차가움을 조금씩 놓아주고 있다. 소피아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린 채 물결을 바라봤다. 옆에 선 로맹은 잠시 그녀를 훑어보고, 다시 강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철학적 자기탐구’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그날, 소피아의 질문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에 로맹은 흥미를 띤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질문보다 대답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그 대답이 단호하지 않고, 오래된 소설을 들려주듯 부드러웠다.

“넌 왜 이런 수업을 듣는 거야?”

“모르겠어. 내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로맹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네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야?”

소피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강물 위로 반짝이는 빛을 오래 바라봤다. 작년 봄, 비가 창문을 두드리던 그날 이후, 물결과 빛은 자주 감각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의 만남은 강의실 밖으로 번져갔다. 카페 창가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소극장에서 프랑스 고전을 보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강변을 걸었다. 로맹과 함께 있으면 길모퉁이 빵집의 버터 냄새나 강변 나무의 잎사귀 질감이 예전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어느 날, 로맹이 말했다.

“넌 너무 많이 생각해. 그냥 즐기면 안 돼?”

“즐기려면 내가 뭘 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원하는 걸 몰라도 돼. 기분 좋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 순간, 소피아는 오래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주어지고, 아무것도 묻지 않던 시절. 하지만 이제 그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여름 초. 두 사람은 남프랑스로 여행을 갔다. 바닷가 레스토랑의 공기는 소금과 구운 생선 냄새로 짙었고, 머리 위의 햇살은 유리잔 속의 와인빛처럼 깊었다. 로맹은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고, 그 웃음은 파도소리와 뒤섞여 멀리 흘러갔다.

소피아는 그들 속에서 묘한 고립을 느꼈다. 식탁 위엔 음식과 날씨, 와인 얘기뿐이었다. 아무도 ‘왜 이곳에 있는가’를 묻지 않았다.


밤, 해변은 바람에 길게 울었다. 모래 위에서 소피아가 물었다.

“넌, 우리가 왜 만나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로맹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냥 좋아서. 이유가 꼭 있어야 해?”

그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안쪽에 경계가 있었다. 그 경계 너머로는 그가 원하지 않는 깊이가 있었고, 그 깊이는 소피아가 찾고자 하는 곳이었다.


가을. 파리, 센 강 위로 회색 구름이 깔렸다. 비가 오기 직전의 공기는 젖은 돌바닥 냄새와 함께 그녀의 뺨을 스쳤다. 소피아는 난간에 기대 섰다. 옆에 로맹이 서 있지만, 오늘은 말이 없다.

며칠 전, 로맹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넌 너무 깊이 들어가. 그냥 가볍게 살면 안 돼?”

그에게는 다정한 조언이었겠지만, 소피아에게는 선명한 경계선이었다.


그날 저녁, 카페 구석 자리. 로맹이 물었다.

“왜 요즘 자주 멍하니 있어?”

“생각하고 있었어.”

“또 그 질문들? 살아 있는지, 존재가 뭔지… 그런 거?”

“응.”

로맹은 컵을 내려놓았다.

“그게 꼭 필요해? 우리가 행복하면 되는 거잖아.”

소피아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알고 싶어. 그냥 기분 좋은 상태가 행복이라면, 그건 금방 사라져. 나는 사라지지 않는 걸 찾고 싶어.”

로맹은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피로가 배어 있었다.

“난 네가 좋은데… 그건 내가 줄 수 없는 거 같아.”

“알아.”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소피아는 가방에서 엽서를 꺼냈다. 노을과 바다, 그리고 ‘감각은 여전히 네 안에 있어’라는 문장.

로맹이 물었다.

“누가 쓴 거야?”

“몰라. 하지만…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말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다.


강가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로맹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잘 지내.”

“응. 너도.”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피아는 비를 맞았다. 차갑고 선명한 감각이 온몸을 스쳤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이 떠나도, 질문은 남는다.”


그리고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나는, 살아 있다고 느끼기 위해 떠난다.”


*


관제실.

거대한 곡면 스크린에 빗속의 소피아가 클로즈업되어 있다. 화면 좌측에는 생체 리듬, 뇌파 패턴, 감정 반응 지수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다.

헤나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박사님, 감각 반응 지수 18% 상승. 비와 촉각 자극에 따른 전전두엽 활동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질문 패턴’이 다시 활성화됐습니다.”

강박사가 화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른다.

“관계의 상실이 감각을 더 선명하게 만들 수도 있군… 그런데 저건 단순한 상실 반응이 아니야.”

헤나가 데이터를 확대했다.

“맞습니다. 이번 반응은 통상적인 애착 단절 패턴과 다릅니다.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게 내면화했습니다. 이것은… 지난번에도 언급드린 ‘신비적 직감 반응’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박사의 눈이 스크린에서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소피아의 얼굴에 고정됐다. 빗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각이 회복되고, 질문이 남았다… 이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일지도 몰라.”

헤나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박사님, 주시 대상을 변경하시겠습니까?”

강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로 둬. 때가 오면, 그녀가 스스로 문을 열 거야.”


스크린 속, 소피아는 빗속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눈빛은, 처음 엽서를 발견하던 날과는 달리 흐릿하지 않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