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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7-1,2

by 강정민

7-1.


윤과의 만남은 예상 밖이었다. 고시원 방에 새순이 돋은 화분처럼, 그는 그 관계를 애써 관리하지 않아도 자라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시간은 관계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그 속에 보이지 않는 균열도 키웠다.


처음 몇 달은 단순했다. 함께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고, 퇴근길에 분식집이나 작은 카페에 들러 하루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윤은 “오늘은 어땠어?”라는 질문을 습관처럼 건넸고, 지민은 조금씩 ‘오늘’을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오랫동안 계산과 효율로만 세상을 보았지만, 윤은 불필요한 일에도 시간을 썼다. 한 번은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우연히 발견한 골목 꽃집에 가서 십 분 넘게 꽃을 고르기도 했다.

“왜 굳이? 오늘은 그냥 집에 가도 되잖아.”

“그냥…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지민은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꽃을 사는 데 든 시간과 돈이, 그저 ‘기분’이라는 이유로 충분하다니.


윤은 가끔 지민에게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건 뭐야?”

“필요한 거면 모를까, 굳이 좋아하는 건… 잘 모르겠어.”

그 대답은 윤을 잠시 침묵하게 했다.


갈등은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휴일에 윤이 갑자기 한강에 가자고 했다. 계획도 없었고, 지민의 일정표엔 ‘휴식’이라고 적혀 있던 날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냥 집에 있고 싶어. 다음에 미리 계획 잡고 가자.”

윤은 웃으며 말했다.

“난 네 일정 속에만 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

그 말이 지민을 불편하게 했다. 일정 밖의 일은 변수가 되고, 변수는 불안을 만든다. 그는 안전을 지키려 했을 뿐인데, 윤의 눈빛은 서서히 멀어졌다.


결정적인 건, 윤이 친구들과의 여행을 제안했을 때였다. 지민은 비용과 이동 시간, 경로를 계산했다. “이건 효율적이지 않아.”라고 말했을 때, 윤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넌 왜 항상 맞는 얘기만 해? …근데, 맞는 얘기랑 좋은 얘기는 다를 때도 있어.”


그날 저녁, 버스 정류장에서 둘은 오래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윤의 얼굴을 반쯤만 비추고 있다.

“지민 씨, 나 그냥… 쉬고 싶어. 더는 설득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의외로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돌아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방에 돌아온 지민은 화분을 바라봤다. 며칠째 새순이 돋지 않았다. 그는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빈 페이지 한가운데, 자신이 쓴 것 같기도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방 안은 더 고요해졌지만,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옳았는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그 질문은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의 가슴 속에서 천천히 울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오래전처럼 낯선 목소리가 속삭였다.

― 물어.


*


사파리 관제실. 강박사가 모니터 속 지민을 바라보고 있다. 지민이 방 한가운데 앉아 노트를 펼친 채, 한참 동안 페이지를 넘기지도 닫지도 않고 있다.


“질문 회로가 재가동되었습니다.”

헤나의 분석이 조용히 흘렀다.

“이번에는 생존 계산이 아니라,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입니다.”


강박사는 화면을 확대했다. 지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좋아. 그는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묻기 시작했어.”


모니터 속 지민은 손끝으로 노트 표지를 천천히 쓸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안에 답이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아직 열어볼 준비는 안 된 사람처럼.





7-2.


그녀의 이름은 사라였다. 처음 만난 건 구호단체의 임시 주방이었다.

사라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빠르게 국자를 저었고, 배식대 앞에서는 항상 웃었다.

“배고프죠? 많이 드세요.”

그 말이 그때는 단순한 인사처럼 들렸지만, 나딤은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귀에 오래 남았다.


처음에는 경계했다. 사라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고,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나딤은 그런 태도를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열면, 다치기만 해.”

“다쳐도… 괜찮을 때가 있잖아.”

그 대답에 나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주 함께 배식을 나누고, 물자 운반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라는 자주 물었다.

“넌 왜 항상 혼자야?”

“혼자가 안전해.”

“그게 안전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게 살아 있는 거야?”


나딤은 그 말이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누군가를 믿는 건, 그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심이 만든 위험이라고 여겼다.


둘 사이의 균열은 물자 분배를 둘러싼 사건에서 시작됐다.

한 아이가 규정량보다 더 많은 분유를 받으려다 관리자에게 쫓겨났다. 사라는 주저 없이 자신의 몫을 아이에게 주었다. 나딤은 그 행동이 곧 다른 사람들의 표적이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렇게 주면, 다음엔 더 빼앗기게 돼.”

“그래도 오늘은 먹일 수 있잖아.”

“오늘 먹이면 뭐해. 내일 굶으면 똑같아.”


그날 밤, 사라는 조용히 말했다.

“넌 너무 오래 도망쳤어, 나딤. 사람을 믿으면 위험하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

그 말은 오래된 상처를 긁는 것 같았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작은 마을로 구호 물자를 운반하는 길에 함께 있었다. 사라는 길가에 쓰러진 노인을 발견하자, 물과 빵을 건넸다. 나딤은 주변을 경계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은 멈추면 안 돼. 이 길은 안전하지 않아.”

사라는 대답 대신 노인 곁에 앉았다. 그 순간, 골목 어귀에서 총성이 울렸고, 그들은 급히 몸을 숨겼다. 다행히 노인은 무사했지만, 사라는 나딤을 똑바로 바라봤다.

“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사람을 외면하는 게 더 무서워.”


그날 이후, 나딤은 사라와 점점 멀어졌다. 그는 여전히 경계했고, 사라는 여전히 손을 내밀었다. 어느 저녁, 사라는 마지막처럼 말했다.

“나딤, 난 네가 언젠가 멈추고, 누군가 곁에 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하지만 그게 내가 아닐 수도 있겠지.”

그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딤은 그 순간, 또 한 번 잃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라가 떠난 뒤, 나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오래된 인형을 꺼내 손에 쥐었다. 사라의 말과, 사라의 눈빛이, 사라의 손끝이 겹쳐졌다.

그는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사람을 믿는 건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외면은 더 무섭다.”


나딤은 그 문장을 읽고,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건, 언젠가 곁에 서있겠다는 약속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


사파리 관제실.

벽면의 스크린 속에 나딤의 모습이 작게 비친다. 어두운 방 안, 그는 인형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다.


헤나가 데이터를 분석하며 말했다.

“신뢰 회로의 활성화가 재검출되었습니다. 감정 억제 패턴이 일시적으로 해제되었고, 자발적 연대 의지가 포착되었습니다.”


강박사가 모니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게 오래 갈수 있을까?”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건… 이번에는 자발적이라는 점입니다.”


강박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화면을 확대한다. 나딤의 눈빛은 예전의 공허와 달랐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뿌리내릴 가능성이 보였다.

“좋아. 이건… 하나의 시작이야.”

헤나의 화면에 ‘관찰 지속’이라는 문구가 표시된다.


스크린 속의 나딤은 인형을 내려놓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 그 모습은 전쟁터 한가운데에서도 누군가를 믿기로 한 사람의, 조심스러운 첫날 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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