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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인심

by 일심일도 채남수

일심일도 채남수

“저---저---저런, 등신 같은 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수진이는 앞에 서 있는 차가 붕붕 대기만 할 뿐 도무지 사택을 빠져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부아가 치미는 듯 욕설을 퍼부어댔다.


아무래도 초보운전자로 큰 도로 좌우에서 전조등을 쏘아대며 경적까지 울려대는 총알 차들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린 듯싶었다.


“병신, 그렇게 운전에 자신이 없으면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일이지 몇천 리나 된다고 지랄이야!”


딴은 그렇기도 했다.


사택은 회사와 지척이어서 굳이 차가 필요치 않았다.


수진이만 해도 그랬다.


차를 타고 정문을 통과하여 사무실까지 도착하는데 십여 분이 걸리지만, 후문으로 걸어 들어가면 5분이면 족했다.


그러나 사택에 사는 사람들은 수진이를 포함하여 천여 세대가 너 나 할 것 없이 차만을 고집했다.


게다가 수진이네 회사는 삼만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이고, 근방에는 수진이네 회사 말고도 규모는 좀 작지만 큰 기업체가 몇 개나 더 운집해 있었다.


그러니 사택 앞은 매일같이 교통지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택 정문보다는 수진이가 서 있는 이곳 후문이 더욱 심했다.


좌회전 금지구역으로 좌회전할 수 없지만, 1~2분 빨리 회사에 들어갈 욕심에 대부분 운전자는 이곳 후문을 택했다.


사실 이곳 후문은 수진이같이 오랜 세월 운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좌우에서 총알같이 달리는 직진 차량 틈 사이로 미꾸라지같이 빠져들어 갈 수가 있었다.


운전이 서툰 사람들은 매양 버벅거리다가 꼼짝달싹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수진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벌써 십여 대의 차가 줄지어 서 있고,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쏘오옥 뽑아내어 앞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떤 차는 일찌감치 상황판단을 하고 정문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도 보였다.


수진이는 다시 화가 치밀어 클랙슨을 ‘빵빵’ 울렸다.


그러자 앞차가 한번 움칫하는가 싶더니 역시 주저앉아버렸다.


앞차 오른쪽을 보니 잘하면 차 한 대 정도는 빠져나갈 수 있을 듯도 싶었다.


'요 설익은 초보운전자 놈아, 잘 봐둬라. 운전의 진수를 내가 보여주마!'


수진이는 세련된 운전 솜씨로 좁은 사이를 스치듯 빠져나가, 좌우를 잽싸게 살핀 뒤 보란 듯이 큰길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큰길로 차체가 반쯤 빠져나갔는데, 왼쪽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얼핏 보였다.


앞에서 빌빌대던 초보 운전 차량 때문에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수진이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손쓸 겨를이 없었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콰아앙 요란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차체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수진이는 핸들에 머리를 묻은 채로 한참을 넋을 잃은 듯 앉아 있었다.


'아~아, 내가 사람을 죽였다!'



좌우에서 경적이 요란했다. 길가에 오토바이가 거꾸로 처박혀있고, 그 바로 옆에 두 사람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 하나님!'


수진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것들 보시오. 무슨 구경거리 생겼소? 다들 저리 비켜요!"


수진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를 꽥 질렀다.


서둘러 차 뒷문을 열고 웅크리고 주저앉아있는 여자를 부축하여 태웠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이 여자는 왼쪽 손만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할 뿐 심하게 다친 곳은 없는 듯 보였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수진이가 막 오토바이 운전자 쪽으로 걸어가려 하는데,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수진이 쪽을 향해서 달려와 오른뺨을 철석 올려쳤다.


"야 새끼야, 너 사람 죽이려고 환장했니? 너 여기가 좌회전 금지지역인 줄 알지? 너어, 모든 책임은 너한테 있는 거야!"


'오, 하나님!'


수진이는 맞은 뺨이 아프지 않았다.


그 사내의 욕설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그가 아무 탈 없이 자기 앞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그저 고맙고 기쁠 뿐이었다.



"정말 기적이군요, 차와 오토바이와 충돌하면 사망 아니면 중상인데---말짱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두 분 모두."


의사는 참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괜스레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수진이는 뒤에 서 있는 아내를 흘끔 돌아보았다.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쫓아 나와 바들바들 떨고 있던 아내의 두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고이고 있었다.


"혹, 후유증이라도---?"


사내가 의사를 쳐다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예, 혹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X-Ray 결과도 그렇고---. 어쨌든 외상이 약간 있는 것 외에는 아무 탈이 없습니다. 지금 바로 돌아가셔도 되겠습니다. 외상 치료도 한 3일만 하면 되니까 통원치료를 받도록 하십시오."



"어이, 김 과장 나 좀 보세."


그때 수진이 회사 동료인 조 차장이 수진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엄지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수진이는 조 차장을 따라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김 과장,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하네!"


"차장님, 무슨 말씀을---?"


“김 과장, 이번이 첫 사고지? 교통사고는 합의가 중요하다고. 특히 질질 끌게 되면 주위에서 바람을 넣기 때문에 합의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서둘러 합의하고 문서 같은 것을 남기도록 하라고.”


"글쎄요, 도대체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슨 합의가 필요합니까? 병원비와 오토바이는 제가 책임지고, 자기도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일 며칠 못하는 것 감수하면 되는 거지---."


"그래,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텐데---."


"아니요,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도 보아하니 순진하게 보이고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조심하게!"


조 차장은 자기의 의견을 시답지 않게 받아들이는 부하직원이 맘에 들지 않았든지 회의 때문에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그만 돌아가 버렸다.


병원비며 오토바이 수리비만을 수진이가 부담하기로 구두로 합의하고 그날은 수진이 생각처럼 무사히 지나갔는데, 일은 그다음 날 오후에 터지고 말았다.



"저---. 남들이 그러는데요. 교통사고는 언제 어떻게 후유증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그러데요!"


"아저씨, 그건 어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수진이는 너무 어이가 없어 사내를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거긴 좌회전 금지지역이고, 사고 낸 아저씨는 경찰에 신고도 안 했고---."


"아저씨,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요, 우리 부부 맞벌이하고 있는데 내 아내가 며칠 일 못 합니다!"


"좋아요, 일 못 하는 것 보상받길 원하시는 모양인데, 얼마면 되겠습니까?"


사내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뭔가를 한참이나 생각하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루에 2만 원씩 쳐서 20만 원만 주소! 물론 치료비와 오토바이 수리비는 형씨가 무는 거고---."


결국, 수진이는 그렇게 합의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수진이를 다시 불러낸 사내의 표정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수진이는 마음이 불안해져 챙겨 온 돈을 얼른 사내 앞에 내밀며 준비해 온 합의서를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남들이 그러는데 나보고 미쳤다고 합디다."


"아저씨, 남들 말은 들을 필요가 없어요."


"나한테 이로운 말을 해 주는데 왜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수진이는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소리를 꽥 질렀다.


"저---삼백만 원에 합의하겠습니다."


"삼백만 원---???"


(1992년 공단문화 콩트 부문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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