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아왔니? "
아버지는 벌써 몇 번째인가 비슷한 말을 반복하였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삭이느라 애쓰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잘못하면 주먹이라도 날아들 기세다
왜 내 말은 들어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역정만 내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이야. 적어도 너와 같지는 않았어. 모든 것이 지금의 너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전교 수석을 했다고."
"저도 제 실력을 제대로만 발휘했다면 틀림없이 수석 할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내 반격에 허리가 동강이난 아버지의 말꼬리가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방안을 맴돌았다
"이놈이!"
아버지는 어이가 없는 듯 말꼬리를 찾지 못하고 멀건히 천정만을 올려다보았다
방안이 다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 바로 내 문제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사실은---"
그러나 김박감에 조바심이 일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왔다
시험 때만 되면 예외 없이 찾아오는 그 몹쓸 놈의 병이 또 찾아온 것이다
머릿속이 갑자기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처럼 방향감각을 잃고 말았다
"그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할 말요? 할 말이 없는 게 아니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나는 실어증 환자같이 마음속으로만 외쳐댔다
"나는 널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이 부족해서 공부가 안 되는 것인지---
난 말이다. 자랄 때 집에서 책 한번 펼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런 속에서 어떻게 공부한 줄 아니?"
아버지의 과거사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주로 소 뜯기는 시간을 활용해서 공부했어. 소 뜯기는 골짜기가 내 공부방이었다고. 그곳은 소가 먹을 수 있는 풀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 놈들을 직접 돌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유일하게 공부할 시간을 주었지. 그런데 넌 뭐냐?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거야?"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몰아붙이는 아버지에게 과연 나는 복잡한 내 문제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약 내가 열심히 공부했고, 주위에서도 나를 인정하고 나 또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면 아버지는 뭐라 말하실까?
다만 시험에 대한 징크스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거라고 말한다면---
답답함에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 것 만 같았다.
조금만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다면 내 모든 문제를 온전히 들어내놓고 상의할 수도 있을 텐데---
까닭 모를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울긴 왜 울어, 하기사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아빠아!---"
아버지는 잔인하게도 자기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셨다.
목이 타시는지 맥주병을 기울여 빈잔에 가득 채우시더니 단숨에 쭈욱 들이키셨다.
답답함이 눈물이 되어 자꾸만 쏟아져 내렸다. 눈물 몇 방울이 상처로 얼룩진 성적표 위에 떨어져 조금씩 옆으로 번져나갔다. 많은 80점대 속에서 유난히 크게만 보이는 95점이라는 영어점수가 눈물에 갇혀 어른어른거렸다.
"아빠, 다음 시험에는 잘 쳐보도록 할게요."
"잘 보겠다고? 잘 본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냐?"
"그것은---"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끌끌 치셨다.
"도대체 너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중학교 3학년이나 되는 놈이--- . 시험을 잘 치루라는 말이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하란 말이야!"
"그게 아니고 아빠---"
"여러 말할 것 없다. 너의 그런 태도로는 결코 네 실력을 올릴 수 없어. 멀리 볼 것도 없다."
'아빠 사실은---"
"됐다, 내 다 알았으니 오늘은 그만두도록 하자."
'아빠 제 말도 좀---"
다급하게 소리치는 내 말에 아버지는 일어서시다가 다시 앉으시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짧은 순간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읽어 내렸다.
이미 오십 줄에 다가선 아버지--- 얼굴은 세파에 시달려 깊은 주름의 골이 이마를 가르고 있었다. 고급공무원이면서도 남은 거라곤 집 한 채가 고작인데,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인 나조차 이 모양 이 꼴로 서성대고만 있으니 그 가슴인들 얼마나 아팠을까. 가슴이 메워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근본적인 치료가 없이는 어떠한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나는 너무도 잘 안다. 이 상태로 이끌리어 가다가 몸도 마음도 지쳐서 결국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래, 난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야. 두근병? 그건 핑개일뿐이야. 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노력할 수도 더 이상 실력을 쌓을 수도 없다고. 난 패비자야, 난 패배자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아니, 애가 왜 이래. 여보! 이리 좀 와봐. 어서 와보라고!"
다급한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되찾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랍고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속으로 울부짖는다는 것이 그만 밖으로 튀어나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쏟아부은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머니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엄마! 내 머리가 이상해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요. 말짱하던 머리가 시험만 치르러면 어지러워 오는가 하면 멍멍해져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요. 어쩌면 좋아요? 엄마! 제발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응 엄마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넋 잃은 사람처럼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던 어머니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이 있음을 나는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무릎을 굻더니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이가 몹쓸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어린것의 고충을 헤아려 주시고 어두움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바뀔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한없이 이어져 나갔다.
그것은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가 아니고 힘 있고 살아 생동하는 파도가 되어 가슴에 들어와 부딪쳤다. 가슴을 짓누르던 겹겹이 쌓인 어두움의 그림자가 하나씩 하나씩 그 껍질을 벗기 시작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