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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진 Jul 21. 2024

누군가 나를 알아본다는 것의 무게

방송이 만든 이미지에 갇힐 뻔했지만 그래도 담배는 끊는 경험

https://fb.watch/tsQbHItMBr/




자랑은 아니지만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20대 당시 상당한 해비 스모커였는데, 담배를 거의 한 번에 끊은 계기 중의 하나가 어린애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같이 일하는 분의 조연으로 다큐멘터리에 나왔었는데, 그것도 EBS, 그 다큐멘터리가 생각보다 시청률이 잘 나왔던 거죠. 동 시간대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인가, 그런 유명 방송을 할 때였어서, 방송국 PD가 아마 시청률이 거의 안 나올 거라고 편하게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가, 말 그대로 매장 앞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경험을 처음 해봤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이 매장 앞에 진을 치고 앉아서 저를 만나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지어 물건이 다 팔려서 매장이 텅텅 빈 상태였고, 저로서는 말 그대로 패닉이 온 거죠. 가족 단위로 와서 과자도 주고 등등 그런 반응을 처음 접한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상태가 됐고, 당시에는 원단 시장만 가도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등 난생처음 유명세를 경험하게 됩니다. 


당시 제가 두산타워에서 일을 할 때였고, 당시 두산타워는 금연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겠다면서 화장실을 향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부모님에게 <TV에 나온 언니 담배 펴요> 이러는데, <아,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공포심이 훅 밀려들었습니다. 당연히 담배를 피우는 행위가 건강에 해로운 거니까 그걸 싫어하는 아이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게 뭔가 저 스스로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서 담배를 끊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끊어야 되는 상태? 이거 이상하더군요. 


당시 EBS 다큐를 얼마나 보겠나, 막연히 생각했다가, 방송 이후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호의를 보이는 탓에 본래 착하게 살기는커녕 그냥 그냥 살아왔던 저는 방송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안에 갇히는 공포도  체험하게 됩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내일의 꿈을 위해 열심히 사는 청년의 이미지를 추구하긴 하지만, 저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폈고, 학창 시절엔 문제도 일으킨 데다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버릇없다 싶을 정도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지겠는 거죠. 누군가는 그 명성을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방송에서의 성실(인지 뭔지 여하 간에) 청년 이미지가 아니었던 터라, 그 거짓 명성을 즐길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비겁하게 도망을 치죠. 물론 공동으로 일 하는 분과 갈등이 극심해진 면도 있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방송에 나온 그 짧은 순간을 기억해 주고 좋아해 준 그 많은 분들이 참 고마웠던 것인데, 저 또한 뒤늦게라도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언젠가 사람들 앞에 설 날이 있을 것을 알고 조금 더 성실하고 착하게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감사함도 부담스러웠고, 얼마 전까지의 제 과거를 마치 없던 것처럼 착하게 행동하는 것도 위선스러워서 그냥 도망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누구의 눈 때문이 아닌, 유명한 게 좋아서가 아닌, 스스로 착하게 (제 기준에서 성실하게) 사는 게 좋아서 그렇게 살고 있긴 합니다만, 이런 지금의 제가 되기까지 시간도 필요했고 저도 좀 고생도 필요했고 그렇죠. ^^;;;; 제가 상처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을 터이니, 값을 치를 필요는 있었습니다, 저도. 


어떻든 당시에 화장실 앞에서 담배를 물고 들어가는 저에게 실망 가득한 눈길을 보냈던 그 아이 덕분에 일말의 미련 없이 이후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점은 감사할 따름이고, 아마 설민석 강사님도 아이가 <선생님을 닮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런 비슷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감히 추론하며 댓글 달아봅니다. 지금 그 아이는 20대 후반 정도 됐겠거나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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