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풋과 아웃풋에 대한 마음 가짐
처음 책이 즐겁다고 느낀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수시입시가 끝난 후였다. 정시로 수능공부를 하는 친구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내게 주어진 유일한 유흥은 책이었다. 그렇게 혼자 도서관으로 몰래 도망가 무라카미 하루키며 톨스토이에 푹 빠져 살았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삶과 책이 같은 페이스로 내게 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 내가 한 친구를 향한 복잡 미묘한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혹은 고등학교라는 정글 속에서 죄책감과 수치심등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책이 내게 그만큼의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풋은 또 다른 인풋을 가능케 한다.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도중 대학교 선배에게 필라델피아에서 있을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에 초대받았다. 그가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임을 몰랐음에도 그가 만들어내는 리듬, 손놀림, 그리고 관객을 압도하는 표정연기, 연기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매 순간의 공기 진동에 몰두하는 것에 철저히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연주의 여운만큼이나 짙은 잔상을 남긴 것이 그가 여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다. "연습 이외의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으며 보낸다." 그 말이 납득이 갔다. 그 말에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가진 역량이, 예술가로서 가진 풍부함이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 그에 대한 순수한 동경에서랄까, 나도 나의 남은 모든 시간을 독서로 채우며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 했다. 그렇게 단순하다면 단순한 열망을 가지게 할 만큼 그의 연주가 내게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어딜 가든 가방에 책 한 권은 꼭 넣어 다녔다. 그러다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공원에 앉아 책을 꺼내 읽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마저도 너그러이 나만의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조성진을 경모한 만큼, 책을 들고 글자에 열중하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애정했다.
대학교 내내 심심치 않게 독서를 하고, 또 내 삶과 같은 속도를 살고 있는 책을 마주하는 날이면 내적으로 소리 지를 만큼의 즐거움을 느끼며 책을 읽곤 했지만 본격적으로 독서를 체득한 것은 2020년도 3월쯤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 뒤였다. 졸업을 하려니 자연스럽게 입학식이 생각이 났다. 그때 스스로에게 대학교에서 딱 한 가지에만 집중하리라고 다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4년 뒤에 졸업할 때 내가 누군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알게 되기를,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그것이 유일한 과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간단한 생각하나로 전공과목보다는 철학 수업을 찾아 들으며, 단순히 시험공부를 위해서 억지로 열람실에 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책들을 맞이하러 도서관에 다니곤 했다. 알아가는 과정이 주는 기쁨은 너무나도 달콤한 여정이었다. 졸업을 한다는 것은 그 과정이 끝이 났다는 것이 아니다. 그 배움이 오롯이 나의 몫이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절실히 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책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위대한 마인드들로 포위당하는 것이다. 책을 알기 전에 나를 둘러싸아 온 것은 또래, 동료, 인생을 조금 일찍 더 맛본 선배, 선생님정도다. 그 정도의 자극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판도를 바꾸는 생각들, 첨예한 통찰들, 나를 허물어버릴 것 같은 감정들을 접한 후에는 결코 계속된 지적, 영적 영감에 배고프게 된다. 그 굶주림은 주변의 사람들과의 시간을 책을 읽을 수 없는 기회비용으로 치부하게 한다. 애잔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를 어떤 방식으로도 고무할 수 없는 관계에 임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 때면 나는 밑바닥까지 간절해진다, 그저 책 속으로 파묻히기를. 그들과의 만남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나는 한 작자의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빈번히 느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에 오가는 도중 내게 남겨진 산더미 같은 실망은 책이라는 유일신, 그 한 줄기의 빛을 향해 손을 뻗어 올리려는 몸부림을 안겨줬다. 그렇게 나는 선택적 고립에 책을 집어 들었다.
고립, 이라는 말이 맞다. 혼자만의 시간을 욕구하는 사람의 태성을 가진 자는 고립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의 선택적 고립감에서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이 아스라이 피우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사회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내 아무리 내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발악한들, 나는 스스로 됨의 사교적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갖춰 마땅한 자질이라고, 입시랄지 취업이랄지 결혼일 수도 있고 인생의 여느 전환점에 있어서 유리하게 작용한다 말 수 있겠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만으로 시간을 오롯이 매울 수 있는 사람이길 갈구했기에 사람과 상황에 능숙한 이 재능은 그간 얼마나 외적으로 에너지와 시간, 삶을 낭비해왔는지에 대한 반증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천성을 꺾을 수는 없다. 천성을 거스르며 어색하게 스스로를 고립시켰을 때, 실은 나는 외로웠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만나 영감을 쫒는 기나긴 여정으로 너무나 허기져버린 나는 실망투성이인 인간에게서 느끼는 괴리로 괴로웠기에, 오히려 외롭기 때문에 잘하고 있는 것이라, 고독할수록 또 독할수록 라라랜드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라고 고적히 외쳤다.
인생은 처참하게 혼자 사는 것이어라, 이런 감성에 젖어들어있을 즘 우연히 집어 들은 <On earth we are briefly beautiful> (Ocean Voung)이라는 책이 누구의 인생이든 철저하게 홀로 살아나아가는 것이라는 아이러니한 위로를 묵묵히 내어주었다. 글을 읽고 또 글을 쓰는 것의 이유가 이런 것이구나, 승복하게 되었다. 우연히 잡아든 책, 밑줄 쳐둔 한 문장, 문장들은 여느 순간들이 닥쳐 들었을 때 꺼내어 먹으라고 작가들이 그 고독한 아우성을 적어 내린 것이다. 그렇기에 나도 나의 투쟁을 글로 적어본다. 외로운 누군가 한 명이라도 언젠가 꺼내먹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런 수년의 고찰 속에 나는 부지런히 독서를 해왔다.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잡아준 유일한 동아줄이기도, 어차피 같이 나락에서 숨 쉴 존재임을 똑똑히 일깨워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을 엮어놓은 책을 집어 들었고, 그에게 뒤통수를 탁 얻어맞았다. 독서가 게으른 행위임을 시사하는 대목에서 말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나의 머리가 아닌 책을 쓴 자의 머리로 생각하겠다는 뜻이며, 학업은 누군가가 걸어가며 좌절했던 절망을 희망 삼아 스스로를 속이는 형태임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여태 스스로에게 어떤 내러티브를 줄곧 사어해 온 것일까. 모든 짬나는 시간을 독서라는 생산적인 행위로 채워 넣는다, 시간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낸다, 쉬운 오락보다는 정신적 함양을 지향하는 엘리티즘에 빠져, 실로 독서처럼 나태한 것이 없다는 다소 당연한 진리를 오랜 기간 의심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줄곧 읽었지만, 오직 때때로 써 내려갔다. 수천수만 개의 인풋이 있어, 그것이 넘쳐흐를 때 비로소 아웃풋이 만들어지는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온갖 저자를 인용하며 장황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그 습지 속 나의 것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올해는 기어코 많은 것을 토해내고 싶다. 두 손이 문들어질 만큼 뭔가를 갈고닭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뛰는 것에 대한 집념을 보여준 것과 같이. 한 사람의 한 가지에 대한 태도는 다른 열 가지에 대한 태도를 필히 이야기해 준다. 그는 달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마라톤을 준비하는 과정, 100킬로를 달리는 도정에서 그가 단련해 온 전념, 혹사, 진득함, 겸허함의 의식은 그가 장편소설을 임할 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든 독자가 알 수 있다. 나도 그런 아웃풋을 할 수 있는 근육을 숙련하고 싶다. 내가 거의 충동에 가깝게 책을 열어 보려는 것과 같이 관습적으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열심히 춤추게 하고 싶다. 지난 나날들의 독서 행위가 동반한 따듯한 공원의 햇살, 커피의 향긋한 향, 도서관의 평온한 적막함으로 개념화된 독서는 내게 거부할 수 없는 황홀감으로 내재화되어 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 같이 앞으로 글을 쓰는 행위가 차곡차곡 쌓이어 일궈냄의 감격스러움으로 내재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번외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든 테마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아래와 같이 관철해 뒀다. 독서를 통해 아래와 같은 말들에 격렬한 동감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존귀한 경험이다. 실제로 그의 냉정한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그 스스로의 자만, 허영심, 고독 등에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은 흔적을 발견할 때면 쇼펜하우어도 인간이구나 하는 마음에 읽는 내내 뒤통수를 얻어맞고, 고개를 끄덕이며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사교성이란 지성과 반비례한다. [...]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고독으로 두 가지 이점을 얻는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 함께할 시간을 얻고, 둘째로는 타인과 함께하지 않을 자유를 얻는다. [...] 사교성은 도덕적으로 떨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거나 불합리한 사람과 접촉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위험하면서 해롭다. [...]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듯 사람과의 만남을 자제하면 영혼이 건강해진다."
"친절이 상대방의 감사로 만족한다면 우정은 친구의 행복으로 만족한다. [...] 서로의 내면에 자극이 되고, 분발하려는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함께 진보하지 않는 우정은 나태와 방종이다. [...] 참된 우정의 목표는 인생의 풍부한 결실, 다시 말해 성공을 기약하는 우정이다. 인격을 갖춘 친구의 선의의 비판이 우리를 선량한 길로 이끈다. 그의 충고는 부모, 스승, 정부의 법률보다 훨씬 고귀하고 강제적이다. 그러므로 우정을 우연에 맡겨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그러하다. 그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 아픔이다."
"사소한 일을 목전에 두었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조차 사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소해지는 원인이다. 하찮은 것들은 비뚤어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자신을 비뚤어지게 만드는 추진력이다. 비록 하찮은 실천이라도 그 마음만큼은 존귀하다. [...] 청소처럼 하찮은 일은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일생이고, 청소일지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겉만 닦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정신이 닦여져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믿었던 것이 성현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