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써 내게 어린이날은 할아버지 기일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기억하기 쉬우라고 좋은 날에 가셨나 보다.” 아빠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잊히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셨는지 입원해 계실 때,
“누가 나 안 찾디? 누구 전화 안 왔었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90년 삶 속에서 나는 기껏 27년의 생애도 잘 모르지만, 최소 그동안에는 소탈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어린이날에 가게 된 것이 이상하게 자연스레 납득이 갔다.
아빠는 지난 58일간 할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윤회사상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했다.
할아버지는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다고 했다.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고 조금이라도 딴 곳을 봤다 하면 할아버지는 금세 넘어지거나 물건을 던저버리거나 하는 사고를 치셨다. 자기 침대에서는 죽어도 잠들기 싫다면서 복도의 벤치에 벌러덩 누워버리셨다.
“병실이 답답하다고!”라고 고함을 치시기도 했다.
가끔은 간호사를 팔로 치기도 하고 침을 뱉기도 하고 쌍욕을 하시기도 했다고 했다.
아빠와 형제들은 할아버지가 마치 완전히 다른 자아를 가진 사람 같았다고 했다.
“그건 다 할아버지가 정 떼고 가려 그러신 거야.”라고 말하지만 그 일화들을 듣기밖에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옆에서 “허허.” 웃으시거나 찬송가를 읊조리며 집안을 요리조리 돌아다니실 것 같다.
그를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그의 머리가 반짝였는데 그럼에도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몇 안 되는 머리카락을 빗으셨다.
할아버지와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현관 앞에서,
“빗을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빗으셔.” 할머니와 고모들은 속이 터져라 할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살아 계실 때는 그저 고집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돌이켜보니 할아버지를 아주 개성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 특징들로 자식들의 기억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아가실 거라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내기를 하는 것도 정말 좋아하셨다.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내기를 하자고 하셨는데,
“재인아, 내가 오늘 몇 보 걸었을 거 같으냐. 내기하자.”
“호수공원 한 바퀴 돌았으니까, 오천보?”
“아비, 너는?”
“아버지 오천보도 안 걸었어 오늘.”
“아녀, 많이 걸었어. 만원 내기다.”라고 자신감 넘치게 재킷을 뒤로 펄렁이며 만보기를 꺼내 보신다. 8 천보.
“만원 줘. 빨리.”
가장 최근에는 병실에서,
“이재명이 안된다에 백만 원을 건다.” 라며 임종이 다가왔을 때까지도,
“이재명은 절대 안 돼!” 라며 본인의 정치적 신념을 조금도 굽히지 않으셨다.
이것도 벌써 가족들 사이에서 웃으며 되풀이되는 담화가 되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삶을 감히 알지 못한다. 아니, 나는 그가 산 삶이 어떤 어려움이었을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의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는 식민지와 육이오 전쟁이, 그의 청년시절에는 월남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적어도 내게는, 월남전에 참전한 것에 대해서 일절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으시다.
하지만 나는 그가 조용히 방에서 왼쪽 다리의 상처를 문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얇은 다리에 검게 파인 자국. 총알 자국.
그로 몇 년 후 할아버지는 하나님을 만났고, 술고래셨던 그는 그 이후로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셨다.
그는 교회의 장로가 되셨고,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 함께하려 하셨다.
작은 행복과 축복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크디큰 시련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명절에 친가를 방문하던 때이면 매 주일 아침 우리는 할아버지 집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온 가족이 원으로 앉아 성경을 읽고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찬송을 불렀다. 예배의 맨 끝 사도신경을 읽기 전에 할아버지는 가족 전원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그들을 위해 떨리는 육성으로 기도해 주셨다.
아빠의 형제들 가온데 형편이 어려워진 적도, 가족 간의 불화가 있었던 적도, 사촌들의 비행이 있었던 적에도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온 힘을 다해 모두를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했다. 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취약성을, 용기를, 그리고 사랑을 배웠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동안 처음으로 혼자였다.
“할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홀로서기 연습 시켜주신 건가벼. 무엇 하나를 혼자 해본 적이 있어야지. 할아버지랑 나는 실과 바늘 같은 거였어서…”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시며 말씀하셨다.
봄맞이 꽃구경을 갈 때에도,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갈 때에도,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에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다니셨다.
그 둘의 손은 반백년이라는 세월 동안 늘 같이했다.
그런 세월에 변치 않는 그 손깍지를 보며 나는 사랑을 배웠다.
그의 다정함을 보고 자란 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고 싶다 느껴왔다.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어가던 중 아빠가 내게 다급하게 영상통화를 했다.
말씀을 못하신다고, 눈만 끔뻑거리신다고 했던 할아버지가,
“재인이 언제 오냐.”라고 말씀하셨다. 언제나와 같은 할아버지의 물음에 나 또한,
언제나와 같이 “조만간 갈게요.”라고 멋쩍게 답했다.
작년부터 내년 봄에 가겠다는 말이, 4월에 가겠다고 습관적으로 했던 말들이 메아리처럼 내게 돌아왔다.
그리고 급하게 비행기표를 사보았지만 나는 그의 임종도, 장례도, 발인도 그 어떤 곁도 지켜드리지 못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입버릇처럼 “봄에 갈게요. 4월에 갈게요.” 그래서 나를 기다리시다가 5월에 가신 걸까.
나는 계속해서 어떤 핑계들을 삼았던 것일까. 한 번의 방문을, 한 번의 전화를 면하기 위해서.
아빠는 할아버지가 병실에서 유일하게 웃으실 때가 증손자 사진을 볼 때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유진이를 데리고 미국은 갈 수 있고 전주에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사무치게 부끄러웠다.
이제 와서 사무치는 후회를 한다는 진부하디 진부한 표현을 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실 여태까지는 할아버지가 건강하셔서 그 누구도 이렇게 가버리실 줄 몰랐다.
촉발제는 단순한 피부 발진이었는데, 그것으로 갑작스럽게 섬망증세가 심해져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셨다.
입원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급격하게 신체 곳곳의 기능들이 저하되며 호흡 관련 질환이 사인이 되었다.
아무도 몰랐다, 처음 입원했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가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는.
할아버지가 없는 할아버지 집에 덩그러니 앉아, 그와 마지막으로 이 집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더라.
그와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주고받았더라.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길게 붙잡아 두는 건데,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마지막인 줄 모르고 기억 속에서 마저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
인간은 왜 죽지, 그리고 인간은 왜 살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자신의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이며,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무엇이지?
할아버지의 임종을 본 사촌 동생은 할아버지가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었고, 굳게 감긴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했다.
나는 그 눈물의 뜻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직은 가고 싶지 않은데, 가는 것이 맞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눈물이었을까?
더 이상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왜냐하면,
할머니는 방바닥만을 쳐다보시면서 “할아버지가 만약에 퇴원을 했더라도 네 아빠랑 고모들이 마음 편하게 각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냐. 서운은 하지만 이렇게 잘 떠나 주신 거야.” 그것이…
현실일지 모른다. 할아버지의 네 명의 자식들, 일곱 명의 손주손녀들, 그의 형제자매들이 다 같으면서 또 각자의 방식으로 후회와 죄책감과 슬픔을 느끼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워진다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
할아버지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셨던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도,
10년 전 그의 팔순잔치 이후로 이번의 장례식이 처음이었다는 것이.
할아버지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 이렇게 모일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닐까...
그의 눈물은 내게 다정함, 신실함,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살고자 함, 그 사이의 모든 어린이다움과 성인(聖人) 다움이다.
그럼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애도하고 기렸다. 서로에게 그리고 그를 향한 다정함 뿐이었던 그의 마지막 순간들로 인해,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다정한 품으로 갈 수 있는 그의 삶이 참으로 행복한 것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