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유진이의 온 우주야. 네가 그의 온 세상이고, 그의 온 세상이 너야.”
손자에 대해서는 별 사소한 거에 대해서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엄마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 넘겼지만.
사실은 내게도 나의 부모의 품이 온실, 그 속 한 그루의 화초인 적이 분명 있었다. 그것은 그 온실이 낡고 구멍 나기 시작할 때 즘에서야 깨우치는 그런 것이다.
나는 줄곧 수동적인 사람으로 살아왔다. 잘 정비된 정해진 길을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강도나 속도로 주체성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먼 훗날 발자취를 돌이키고 나서야 ‘힘’을 능동성이라고 착각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준 ‘힘’에는 아무런 무게감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수동적 삶은 엔트로피와 같은 것이라서 어떤 역행적 노력이 없이는 능동적 삶을 선택할 수 없다. 그 역행의 기회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하듯 피아노를 배우고 발레 교실에 갔다. 아빠 직장에 따라 몇 차례 이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오가는 친구들의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정해진 초등학교, 정해준 학원에 다니고 엄마가 세운 전략에 따라 중고등학교, 궁극적으로 대학교까지 무탈하게 진학했다. 입시를 위한 모든 교내외 활동과 전공의 선택, 그 전 과정의 모든 세부 결정권은 엄마에게 있었다.
제2 순위 대학의 탈락 공지를 집에서 확인했던 엄마는 아직 학교에 있었던 내게 곧바로 전화를 했다.
“재인아,… 미안하다. 엄마가 잘 못 판단했어. 이 과로 몰릴 줄 몰랐네. 어떡하지? 다른 과에 넣었어야 했는데.” 그녀의 흐느끼는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발표인지 몰랐다고. 별 큰 상관이 없다고. 내 인생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상황들이 엄마의 문제들일 뿐이었다. 나는 쾌적한 방관의 영역에 머물렀다.
제3,4,5 순위의 학교들에게 합격 통보를 받았고 그녀의 판단으로 특정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일절의 고통도, 기회비용도, 노력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결과에 미비한 만족감을 느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부모, 그들의 선택을 신봉했고 결과로써 다시 믿음을 확고해가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까지는.
대학교 3학년이 된 나는 엄마의 권고로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된다.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마침 자신의 출장과 일정이 맞물린다며 미국에서 만나자고 했다. 맞물렸다기보다는 맞물리게 했다. 최소 나에겐 그런 인상이 남았다. 회사 임원이었던 아빠는 재계약이 불투명했고, 그런 와중에 출장을 빙자한 여행은 너무 무모하다는 엄마의 말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에. 엄마에게는 늘 조심성이 있었다. 그 조심성은 주변 사람들을 기세를 꺾는 그런 것이었다. 유년기,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고 나서도 습관처럼 전적으로 내게 있어야 할 자유, 그리고 자주를 행사하는데 늘 망설임이 있었다. 심지어 옆 나라에 살고 있는 엄마의 우려가 벌써 들리는 것만 같아서.
어쨌든, 나는 아빠의 일정에 맞춰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 결과 제일 친한 친구와 같은 학교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는 기적과 같은 행운을 얻었음에도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그것이 퍽 서운했다고 내게 나중에 말해왔다.
미국에서 학기가 끝나갈 때쯤에 아빠한테 연락이 왔다.
“재인, 미국에서 생활이 즐겁니! 그냥 돌아오기 아쉬우니까 인턴을 해보는 건은 어때?”
“인턴을 하는 건 좋지만, 현실적으로 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거 같아. 아쉽게도.”라고 답장을 보내자 아빠가 본인이 다니는 회사의 뉴욕 법인에서 짧게나마 인턴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며 뉴욕 법인 본부장님의 연락처를 전했다.
자산운용에 ‘자’도 모르는 내게 이 인턴직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커리어에 대한 절박함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부모에 대한 맹신으로 단번에 떨쳐냈다. 그 맹신에는 아빠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완벽한 준비 하에 내게 조언을 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본부장님께 연락을 드렸을 때 돌아온 답장은,
“재인 씨. 인턴을 하기 위해서 관심 있는 회사에 지원해 보세요. 그러나 비자를 지원해 주는 회사를 찾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라는 조언뿐이었다.
찰나의 당혹스러움은 뒤로 하고 아빠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고 본부장님에게 월요일부터 출근을 하라는 답장을 받았다.
학기가 막 끝났던 그 겨울에 나와 내 친구는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브루클린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맨해튼 미드타운으로 출근해야 하기 위해 새벽같이 눈을 떠 M선을 타야 했던 매일 아침만큼 괴로운 게 없었다. 뉴욕의 2월은 추웠고, 제멋대로인 버스나 전철 스케줄에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맞이하는 아침을 통해, 직장인의 삶의 무게를 처음 느꼈다. 이런 걸 아빠는 30년 가까이한 거구나라는 짠한 마음과 함께 추위에 불어 터진 구두와 바지 사이의 등볼살을 바라보며 출근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눈보라보다도, 지독한 졸음보다도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힘겹게 도착한 오피스의 그 누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누굴 위해서 이 인턴이 존재하는 걸까? 이 인턴이라는 게임 속에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재인 씨는 전공이 뭐예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나의 선임이 물었다.
“컴퓨터 공학 전공하고 있고, 앞으로 이 쪽 일을 하고 싶어요.”난감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속으로 ‘그러면 왜 여기에 와있는 거죠?’라고 말하는 듯했고 나도 속으로 ‘그래서 저도 여기에 왜 와 있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연초이기에 중요한 감사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감사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회계사가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해서 선임이 열심히 말해주다가도 속으로 ‘이걸 내가 열심히 말해봤자 이 친구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망설임이 느껴졌고, 나도 열정적으로 배우려 했지만 진심 어린 흥미를 느끼기 어려워 행여 나의 질문 속에 그런 가식이 드러날까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많은 문서 작업을 하고 또 많은 문서를 분쇄하며 시간이 흘렀다.
여러 고민후 선임은 내게 펀드매니저에게 보고할 시장 조사를 시켰다. 그나마도 나에게 유의미한 과제를 찾아내주기 위해 그들이 시간을 뺏기고, 그럼에 따라 나는 더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러기엔 너무나도 많은 희생이 따랐다. 전공을 조금이라도 살려보자 결과를 보고하는 간단한 앱을 만들어보았지만 조금 신기할 뿐, 그다지 유용하다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에 괴롭고, 그들도 내 미래에 큰 도움이 되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괴로웠다. 그런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흐름과 같이 분쇄되는 것은 나의 의지, 나의 정성 그리고 나의 꿈이었다.
결국 그 누구 하나에게도 득이 되지 못한 채, 수동적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이에게 짐이 되는지만 절절히 깨달은 채 인턴이 끝났다. 나보다 나를 더 위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빠의 제안은 분명 내게 도움이 될 거야, 그의 선택은 분명 나에게 최선일 거라는 확신의 끝에는 오만한 배신감만이 남았다. 인턴 동안 느꼈던 무의미함에서 오는 괴로움,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 같다는 고통, 그 상황에서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은 나의 오롯이 나의 몫이다. 이것에 대해 아빠는 아마도 앞으로 영원히 무지할 것이다. 아빠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내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이었던 걸까?
그럼에도 그를 탓할 수도 없는, 무엇하나 스스로 일궈내지 못한 수동적인 존재가 스스로에게 너무 큰 상처였다. 향할 데 없는 분노만이 남았다.
부모의 세상이 내가 아니다, 나의 세상은 부모였는데.
나의 삶을 그들에게 위임함으로써 내가 마주해야 할 책임은 그들의 삶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주제척으로 살지 않음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는 나를 위해서 누군가에 의존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 삶을 살아줄 수없다. 그때의 충격으로 나는 하나둘씩 삶을 재정립해 나아갔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 그것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찾아 나섰다. 새벽같이 눈을 떠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공부, 그를 위한 왕복 세 시간 넘는 통학을 했지만, 심저부터 나는 웃고 있었다. 불안한 미래와 열등감에 자주 좌절했지만 마음 한 점 불편함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나만의 가설을 세워 검증해 보고자 옆나라에 가서까지 찾아 헤매었다. 그러기 위한 장학금을 얻어냈고 선택의 능동성에서 책임의 능동성에 한걸음 가까워졌다 느꼈다. 밑바닥을 온몸으로 쓸고 다니면서 놓칠법해 보였던 굴러들어 온 기회를 잡았다. 나는 그 필연적 행운을 거머쥐어 나의 이론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해 냈고, 역설적으로 오로지 내 힘으로 땀과 눈물이 범벅되는 날들 끝에 원하는 직장에 원하는 직무의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확실해진 미래와 함께 8학기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의 모든 실패에는 단 한 번의 무력감도 분노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 와중 아빠에게 온 문자.
잊을 때만 되면 다시 상기시켜 주는, 모두는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
“재인! 축하한다. 네가 제시간에 졸업을 하여 사회인이 되는 것에 아빠는 아주 기쁘다. 너의 졸업이 늦어지면 아빠 인생의 타임라인도 엉켰을 거야.”
아빠가 기쁜 이유는. 내가 그의 타임라인에 차질을 주지 않아서.
아빠의 자유. 아빠의 새 출발.
주체성을 가지고 독립을 하리라 굳게 먹은 마음도, 사실은 그의 청춘과 열정에 애정 어린 칭찬이, 응원이 필요했다. 온실밖에 나와도 가끔은 보살핌 받고 싶은 마음이라고,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당혹감을 혼자 숨긴 채 말하지 못했다.
부모도 그들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래야만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자녀가 독립을 하고, 독립하는 과정에 괴로워하고 상처받을지라도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 당연하고 씁쓸하기도 한 이치를 배워갔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때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아빠가 나 졸업할 때 자기 타임라인에 맞춰 졸업해 줘서 고맙다고 한 거 알아? 진짜 웃기다니까, 이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몰랐니.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 근데 책임감은 강한 사람인 거다, 그거. 그렇지 않고서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지.” 엄마가 답했다.
나는 어느새 유진이 엄마가 되었고, 유진이 아빠와 늘 농담처럼 유진이는 공립대에 가야 한다 말한다. 친구들에게는 벌써 입이 닳도록 유진이가 중학생이 되면 기숙사 있는 학교 보낼 거라고.
아빠가 내가 별로 원하지 않았던 대학에 전액장학금으로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진학하기를 권했던 것처럼.
내 성향과 진로와 별개로 독립에 도움이 될만한 인턴을 권했던 것처럼.
그리고 나보다도 나의 독립을 간망했던 것처럼.
그런 그를 이기적이라 하면서 나는 멋진 커리어우먼인 거처럼.
부모가 돼서야 비로소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에 대한 사랑 희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부모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게 되고 내 안의 이중잣대를 똑바로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도정에 치유가 있다.
나를 수동적 인간으로 만든 엄마에 대한 비판보다는 앞으로 필연적으로 유진이를 대신하여해야 할 수많은 선택들의 어려움과 책임, 그에 따른 경외심을 느낀다.
아빠의 이기심에서 인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배운다. 그의 모습에 용기와 낙관을 얻는다.
그 둘이 있었기에 그 사이를 잘 조율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희망해 보며 온실 안에 갇혀 있었던 시절의 상흔도, 온실 밖으로 꺼내진 시절의 상흔도 치유해 간다.
유진이를 만나 나의 세상은 넓어져 가고, 그의 온 우주가 되었다. 그럼에도 또 나는 나를 위해 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유진이도 나와 같은 상처를 받기도, 또 엄마로서 실패한 나를 보며 한 인간으로서 영감을 받기도 하면서 유대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