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모두의 김장우여, 안녕.

by 재인

오래된 인연의 관성은 너무 강해 끈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그중 한 명이 완전히 새로운 욕망에 휩싸이지 않는 이상.


인간은 욕망 앞에 한없이 무력하다. 도스토예브스키가 말하듯, 인간은 가능성을 저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발가락 핥아도 돼?"

"발.. 가락?"

응, 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발바닥을 거칠고 또 세심하게 핥았다.

그녀의 발가락 사이사이가 흥건하게 젖어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그녀의 온 근육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허리가, 엉덩이가, 갈길 잃은 가녀린 팔들이 들썩거렸다.


그와의 사랑이 여태까지 그녀가 알던 것과는 너무 달라 그녀는 시야가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앗아가도 좋을 것 같은 무방비 상태. 그녀는 더 이상 항거할 수 없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줄곧 그녀의 전애인 꿈을 꾸었다.


둘은 평소처럼 시선을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오랜 대화는 그이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를 헤아려주었다.

문장이 되어 그의 입술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마음 가장 낮은 곳에 도착해 있는 다정함.

그 애틋한 공명 끝에는 슬픔도, 미련도 아닌 어떤 따듯함의 눈물이 있었다.

그 유일한 실체에 그녀는 꿈에서 깨곤 했다.


꿈에서 일어나 서너 분 정도는 마음을 놓고 울어버린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왜인지 입 밖으로 꺼내어 본다.

"김장우."

그러면 그도 똑같은 리듬으로,

'서이진.'

그녀의 이름을 읊어주겠지.




금요일 오후. 일이 끝나자마자 그의 집으로 가는 것이 어느새 루틴이 되었다.

비가 오던 그날 이후, 그녀는 매 주말을 그와 함께 했다.


그녀의 눈이 초조한 듯 계속해서 모니터 속 시계로 향한다.

벌써부터 몸이 달아올라 안절부절못하다.


그녀는 급히 노트북을 닫고 퇴근을 한다.

그와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


그녀는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단정히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결을 매끈하고 부드럽게, 그가 안 훑는 곳이 없으니.


그녀는 손끝으로 살갗을 구석구석 어루만져본다, 그가 그녀의 온몸에 낱낱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할 것을 상상해 보며.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또 어김없이 김장우가 꿈에 나타났다.


그날따라 그의 미소는 더욱 만개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손짓을 했고, 그녀의 등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의미를 그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일 년 전 즘 둘이 함께 본 영화의 한 장면이었고, 꿈에서 그도 정확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둘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으로 헐레벌떡 숨이 차 잠에서 깨어났다.


김장우와의 모든 것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그는 그녀를 찾아와 언제나처럼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 모조리 도려내버린다.




"그냥 자고 가는 게 어때. 비 오잖아."


두 성인 사이에 그냥 자고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중한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렇게 쉽게 내어줄 것이었으면, 이건 김장우에 대한 마지막 매너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그녀의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의 입술도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그럴까."

"그렇게 해. 너도 알다시피 아무도 안 쓰는 방이 두 개나 더 있잖아."

"그럼... 오늘만 신세를 질게."


그는 그녀에게 안방을 권했고, 수건과 잠옷으로 입을 것들을 꺼내두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그의 세면대에서 옷을 벗고, 그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그의 옷을 입고 침대에 올랐다.

그가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려왔고,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몸에 뒤엉킨 그의 샴푸냄새와 그의 빨래냄새.

그가 누군가와 몸을 섞었을지도 모를 그의 이불속.

잠이 올 것 같은 몽롱한 공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이 어려워졌을 즘 정적 속에 방문이 열렸다.

이불의 바스락 거림. 그녀를 감싸 안은 한층 농밀해진 그의 향취.




비가 오던 그날로부터 며칠 후,

그녀는 김장우를 오랜만에 마지막으로 만났다.


둘의 만남은 늘 오랜만이었고, 늘 마지막일 것만 같았다.


그가 미국에서 모처럼 한국으로 출장을 왔다고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공백이 몸에 익은 둘은 더 이상 바삐 빈틈을 채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반가운 마음을 만끽할 뿐.


여느 연인처럼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

그들 주변의 공기마저 아늑해지고 이윽고 그녀는 모든 것이 안온하다 느낀다.

그녀는 이것이 사랑이 맞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분위기는 무르익어가는데 이별의 순간이 벌써 훌쩍 다가온다.

그것이 아쉬워 그 둘은 걸어온 곳을 몇 번이 곤 되돌아 걸어본다.


"숙소가 근처인데 잠시 들렸다 갈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실 거라도 사러 가자."

김장우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걸어가던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매번 새로운 손끝의 저릿함을 느낀다. 말초신경을 타고 오르는 떨림.


어느새 마주 잡았던 손은 그 둘을 더 가깝게 끌어당겨 서로의 팔에 서로의 가슴에 맞닿았다.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맥주, 예전에 먹어보고 싶었다고 했던 간식을 집어 들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삶의 모습이 자신들에게도 허락된 하나의 가능성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실금 같은 희망을 기어이 붙잡아 늘리려, 더 이상 살 것이 없는데도 기웃거리며 보류된 행복을 조잘조잘 이어갔다.


그러다 그녀는 김장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멋쩍게, 그의 몸짓이 영 쭈뼛거리는 것을 알아챘다.


"더 필요한 거 있어?" 그녀가 물었다.

"오늘.. 할 거야?"

"어? 아.. 오늘?"


순간 땅으로 떨어진 그녀의 시선이 그의 눈에 담겼다.

그는 자신의 눈을 피한채 한참을 여러 감정을 매듭지으려는 그녀에게 문득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그의 시선과 짙은 침묵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오늘 말고 우리에게 시간이 있나.

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의 시간은 늘 한정되어 있었고, 늘 저물어갔다.




"페티시 같은 거 있어?"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의 품에 스며들며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기도 잠시, 순식간에 그녀를 들어 올려 소파 구석에 거세게 앉혔다.


"그대로 있어. 움직이지 말아 봐."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녀에게 걸어오더니 그대로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아 올렸다. 그녀가 저항할 틈도 없이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바지 사이로 들이밀었다.


"난 이곳 냄새 맡는 게 그렇게 좋더라. 하, 미칠 거 같아."


한 마리의 굶주린 짐승처럼 그는 그녀의 바지사이를 끝없이 파고들었다.

그 뜻밖의 게걸스러움에 그녀도 모르게 자신의 속옷이 축축해져 감을 느꼈다.


"흐흡.. 하아.." 한참을 그녀의 체취에 도취되고서 그는 고개를 들고,

"너는? 너는 뭘 좋아해?"

"나는…."

그녀가 망설이자 그는 궁금해 미칠 거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거."

"서이진, 이렇게?"

"어, 절정에 다 달았을 때."

"윽, 서이진! 이렇게?"

둘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이름 불러줘."

"요한아."

"아니, 절정에 다 달았을 때."

"앗, 이요한 너무 좋아. 이렇게?"

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바지를 벗겨버렸다.




"나 미국에 가게 되었어."


그가 꿈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무게를 모든 계절 함께 견뎠던 사람으로서, 김장우의 꿈은 서이진의 꿈이었다.

그의 성취에 샘솟는 애정과 축하의 마음을 채 말로 표현하지 못해 그녀의 가슴팍에 모아진 두 손을 동동거렸다.


"진짜 잘됬잖아! 정말 축하해."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옆에 있어줘서."


쑥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본인의 삶에 매 순간 치열했던 그의 뒷모습을 동경했고,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그들의 관계를 사랑했다. 그녀는 물리적 거리감이나 지극히 현실적인 논의 들는 일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 사사로운 불안들은 그들에게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으리라 굳게 믿은 채. 그와 그녀는 세속적인 문제들 이상의 관계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을 성실한 신의가.


그에겐 그와 그의 연구 밖에 없었고 그녀에겐 그녀와 그녀의 일 밖에 없었다.

둘에겐 각자의 삶의 다른 우선순위로 인한 반복된 헤어짐이 있었지만,

에둘러 여정의 끝에 한층 더 멋진 모습으로 서로라는 집에 돌아오기를 몇 번이 곤 해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김장우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여태 그녀가 아는 어휘들이 아니었다.


"이진아."

"응?"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이번에만 조금 욕심을 낼게."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거라고, 우리 약속했잖아."

"알지.."

"언제나와 같을 텐데 뭘 걱정해."

"이번만큼은 엇갈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 네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이번엔 꼭 말해야 할 것 같아."

"…"

"나랑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자."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까지 그 짧고도 아득한 억겁의 시간 동안, 그는 준비해 온 말들을 반추해 본다.


'여태까지도 네가 일 순위였어, 너와의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달려온 거야. 바보같이 그 과정에서 궁극적 꿈을 잊고 너를 잃어버릴 뻔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아. 너와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여유롭게 브런치를 해 먹고 주말의 심심함을 만끽해보고 싶어. 할 것 하나 없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은 숨 막히는 너와의 매 순간을 보내고 싶어.'


그 정성스러운 반성도 기약도 끝내 입밖에 나오지 못했다.




이요한이 본가에 돌아간 주말이다.


그를 만나지 않는 주말이면,

그녀는 이미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버린 채, 온통 그 생각에 안달 난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제야 조용한 핸드폰을 발견한다. 그에게 연락을 할까 고민해 본다.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과 망설이는 손가락들 사이에서, 그녀는 나신의 굴곡을 나누는 것보다 일상을 나눈 것이 더 어색할 수 있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그녀는 그와의 성애 속에 성인식을 치른 것 같은 자신을 자각한다.


침대에 누워 눈앞에 선명한 그의 열정을 떠올린다. 어느 하나 대충이 없는, 온마음을 다해 임하는 그이. 플라토닉 한 관계에 늘 풀어야 할 육체의 과제가 아닌 심혼의 사랑. 행위 그 자체로서의 사랑.


의지가 무력하게 무너진 그녀의 손은 중력에 이끌려 아래로 향하는 것을 참지 못함을 느낀다.

털이 정리되지 않은 그녀의 다리 사이.


"제모하지 마. 너의 날 것 그대로가 좋아. 너의 거친 모습들이 나를 미치게 해."

라고 말하며 몇 번이 고는 그녀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잠하는 그. 그에게 엉겨 붙은 그녀.


그녀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진다.


그녀는 그녀의 손을 놀리는 것을 억제하지 못함을 더욱 강력하게 느낀다.

조금씩 더 빠르게. 그의 말들을 되뇌며.


그의 이름이 흘러나와 수줍게 방안을 메아리친다.




"좋았어?"

김장우가 물었다.

"어, 어. 당연하지."

그녀는 아쉬움이 드러나지 않도록 말했다.


김장우와의 사랑은 상대방도 주저하게 하는 망설임, 노련하지 못한 열정, 투박함 그런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처음이자 유일한 상대였다는 것이 너무 당연했다.

노력하는 그가 가엽게 느껴질 때면, 그녀는 이것이 필히 사랑이라 느꼈다.


하지만 사랑의 행위가 끝난 후 그녀는 발산되지 못한 에너지를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몸을 뒤척이곤 했다.


좋았다는 말에 거짓은 없다. 김장우는 그녀를 다른 방식으로 절정에 이르게 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그녀가 그 깊은 눈동자 속을 헤엄치게 될 때, 그녀의 발끝부터 손끝 마디마디가 저려온다. 그의 무해한 섬세함은 너무 큰 자극이 되어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타고 흐른다.

호흡이 가팔라지고 심장은 살려달라 아등바등 치다 못해 저릿해 온다.


개별적 단어들, 사건들은 공기 중으로 흩날려지고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간다.


이것은 필히 사랑이라. 사랑의 절정이리라.




이요한이 본가에서 돌아와 그녀에게 이번 주말은 해변가에 가자했다.


둘은 기차를 탔고 어깨를 나누며 책을 읽었고 창문 너머의 경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변을 따라 걷는 동안 파도 소리 사이로 서로의 손등이 간헐적으로 맞부딪혔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손을 몸 주변으로 거두어들였다. 온갖 은밀한 곳을 더듬는 것보다 담백하게 손을 잡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잡고 싶은 갈망과 자기 검열 사이에 손이 갈팡질팡 하던 와중, 그가 먼저 손을 잡았다.


"있잖아, 우리가 손을 잡는 게 어떤 의미야?" 그녀가 물었다.

"손을 잡는다고 갑자기 우리를 어떤 관계로 특정 지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이런 행위들이 우리의 관계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거지?"

"사르트르가 말하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손을 잡았다면 손을 잡은 사이가 되는 거겠지." 그는 철학자를 인용한 본인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는지 웃어보았다.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녀의 가슴 안쪽이 뻣뻣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메울 수 없는 커다란 한 상실의 전조였다. 그녀는 끝내 김장우와의 서약을 지켜내지 못했음을 직감했다.


손을 잡았다는 것은 손을 잡은 사이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사랑을 나누었다면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이었다.




"너이어야만 해. 서이진은 김장우이어야만 해."

"응. 김장우도 서이진이어야만 해."


그녀는 밤새 연구를 하고 겨우 눈을 붙이러 온 그에게 애교를 부려본다.

오랜만에 만나서 온기를 나누고 싶었던 그녀는 누워있는 그의 위에 올라가 본다.


"귀여워. 이진. 사랑해."

눈을 감은 채 피곤해도 여전히 진심을 다해 소중히 해주는 그의 손길.

그녀는 그의 피로를 이해한다. 아쉬운 듯 그의 몸에서 내려와 옆에 눕는다.


"너 자꾸 나를 방치하다 내가 다른 곳에 한눈팔면 어쩌려고."

"한눈팔아. 너에게 그런 욕구가 있다면 해소해야지."

"그래도 우리 사이에 변하는 게 없다고 말하려는 거지?"

"빙고."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 합보다 고귀한 것이라는 믿음. 욕구는 그저 비워내야 할 배설에 불과하다는 서약.


김장우는 끝내 잠을 이겨내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을 잠꼬대로 중얼거렸다.


'너라면 다 이해할 수 있어.'

'너라면 다 용서할 수 있어.'

'너라면.'




"사실은 아빠가 집을 나갔어.

집을 나갔다는 표현이 웃기지, 무슨 가출청소년도 아니고.

근데 이혼이라는 말은 내 마음이 내키기지가 않아."


사랑을 나눈 후 그들은 언제나 온 에너지가 다 소모돼 한참을 축 늘어진 채 있었다, 몸이 뒤엉킨 그대로. 모든 것이 연소된 황혼녁과 같은 시간에는 어떤 친밀함도 허용되는 것만 같았다.


"엄마랑 아빠는 깔끔한 사이였는데.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고 외동인 나도 문제아와는 거리가 멀었지. 그래서일까, 둘에겐 희로애락이랄 것이 없었어.


고등학교 즘인가, 모든 걸 내 중심으로만 생각하다 문득 그들의 일상을 인지하기 시작했어. 아빠도 나도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왔기에 엄마는 밥을 차릴 필요가 없어진 거야. 아빠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지방에 내려가 살고 나는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엄마는 빨래를 할 필요도 없어졌지. 엄마는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고 쇼핑을 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삶을 살더라고.


아빠는 떠나면서 내게 말했지, 은퇴하고 엄마랑 시간을 보내려 보니 숨이 턱 막히더라고.

아빠가 떠나고 엄마는 내게 말했지, 아빠 덕분에 얼마나 편안 삶을 살았는지 고마울 뿐이라고.


그런 엄마를 보며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수십 번을 다짐했지."


"물론 어떤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알아. 대부분의 여성이 그런 삶을 살았지. 웃긴 건 그걸 보고 자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도 똑같이 선택이 없다는 거야. 커리어 없이 가정을 꾸리는 선택지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그건 실패의 삶이고, 그건 보잘것없는 삶이라고 정해져 버렸잖아."


"평화롭고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도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게 결혼인데, 그런 거 따위가 내 삶의 일 순위일 수는 없잖아. 모두는 각자가 하고자 하는 것에 매진하면서 살아야 해. 그래야만 하는 새로운 억압을 받게 된 거야.


진심을 다해 사랑은 사람을 기적적으로 만나더라도... 그런 소중한 것에 전부를 걸어보지도 못하는, 참 하찮고 불쌍한 삶인 거야."


어느새 고해성사가 되어버린 그녀의 말들.

그녀가 속이 문들어지게 꺼내고 싶었던 말들은 사실 이요한에게 할 말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김장우는 늘 피로했고, 김장우의 가족은 늘 평화로웠다. 그들에게는 허용된 친밀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참을 듣기만 하다가 이요한은 본인의 부모님도 따로 사신지 오래되었다는 말만 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김장우와 다르게 그녀의 문제를 그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




김장우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의 차가운 공기는 그녀의 폐부를 날카롭게 찔러왔다.


"이제 갈게. 너도 어서 들어가 봐."

"잘 지내."

"한국 오게 되면 연락해도 돼?"


그 마지막 물음에 그녀는 대답 대신 입술을 짓씹었다. 시선이 맞닿으면 참아온 눈물이 터져버릴 것을 알기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너머 흐릿한 허공만을 응시했다. 그날 그가 어렵게 꺼낸 그 질문이, 둘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생각하며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모욕하지는 말았어야 한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부여잡았고.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도 생각하면서 그녀의 답이 어떠하던 결과가 같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도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조금이라도 유예될 수 있었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부여잡았다.


그는 끝내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가 게이트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순간, 그와 그녀는 동시에 울음을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처음 그녀가 이요한과 침대를 나누었던 밤. 비가 오던 그 밤.


그는 조금씩 하지만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의 그것에 닿을까 지나치게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조금씩 그렇지만 티가나지 않도록 그에게서 멀어지려 노력했다.


"안아도 돼?"


그녀는 그를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의 반대방향으로 돌려 누우며,


"스푼은 어때."

"스푼이 뭐야?"

"두 개의 스푼이 포개진 거처럼…"

"이렇게?"


그의 몸이, 굽이 굽은 곡선들이 그녀의 몸, 그녀의 굽이 굽은 곡선에 밀착되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를, 가빠지는 숨소리로 간지럽혔다. 그녀의 엉덩이는 그의 그곳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둘의 다리는 완전히 포개어져 한쌍을 이루었다.


"스푼이라, 참 좋은 거네."

"처음이야?"

"응."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뜬금없는 그의 말에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하하."

긴장이 풀린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스쳐 배꼽으로 내려갔다.

"나도 좋은 거 알려줄 수 있는데."

다시 그녀의 몸은 꼿꼿이 긴장되었고,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빨리 뛰고 그녀의 몸이 뜨겁게 부플러 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신체부위가, 안에서부터 날것의 모든 세포들이 그의 손길을 애절하게 원했다.


그녀는 어렵게 호흡을 가다듬고 더 늦기 전에 그의 손을 멈췄다.

그를 원하는 그녀의 가슴도 그녀의 배꼽도 배꼽 아래도 아쉬움에 옴싹달싹을 못했다.


"으, 으응… 그만."

"왜?"

"아직은..."

"그럼 스푼은? 이대로 잠들어도 돼?"


그 이후로 한참을 달궈진 두 몸은 잠에 들지 못했다.




"오늘.. 할 거야?"

"어? 아.. 오늘?"


그녀는 문득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녀의 몸이, 다른 남자와 포개져있었던 그녀의 몸이, 욕구에 부들부들 떨렸던 몸이 떠올랐다.


"안 할 거야?"

원래 같으면 그럴 기분이 아닌가 보다 하고 넘겼을 그이지만, 그녀의 몸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어보는 것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어서 그런가, 좀 어색하네."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면서 아무 말이나 뱉었고 그걸 주어 담는 그의 표정은 굳어갔다.


"그래. 그럼 계산하고 나가자."


둘은 적막 속에 계산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갔다.


"미안."

계속되는 침묵을 그녀가 어렵게 깨며 말했다.

"아냐, 뭐가 미안해."

"왜 아무 말이 없어."

"너에게 내가 어색할 수 있구나. 어쩌면 당연한 현실인데도, 그런데도 마음이 좀 아프네. 서이진한테 내가 낯선 존재가 되었구나. 여기가 찢어지는 거 같아." 그는 손을 왼쪽 가슴에 가져가며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생각 없이 뱉은 말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그 말이 더 큰 상처가 될까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주려한 말은 아닌데… 미안."

"아냐. 내가 한 선택들이고. 그 결과도 나의 몫이지."


둘은 무거운 정적 속에 술을 마셨다.


"먼저 샤워할래?"

"너 괜찮다면 먼저 씻을게." 그녀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에 멍하니 서있었다. 물줄기가 그녀의 머리부터 흘러 어깨 가슴 배 엉덩이와 다리사이를 적셔갔다. 그녀는 물줄기가 그녀의 배꼽아래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바라봤다. 김장우의 엉거주춤한 할 거냐는 질문과 분출되지 못했던 그간의 사랑의 행위들. 이요한의 저돌적인 안아도 되냐는 질문, 그의 체취로 포위당했을 때 그녀가 줄줄 흘렸던 욕망의 흔적들. 끝내 그녀에게 허락되어 왔던 것 이상의 쾌락을 발견한 이상, 그녀는 그 가능성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외투조차 벗지 않은 김장우가 보였다.

"나갔다 오려고..?"

"아무래도 같은 공간을 나눌 기분이 아닌 것 같아."

"왜?"

"왜냐고?"

"그러지 마아. 이러지 말자…"

"이진아."

"응."

"나는 상실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샤워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더라."

그녀도 본인이 무의식 중에 노래를 흥얼거렸다는 것에 놀랐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랬어?"

"이진아."

"응..."

"네 말대로 낯설다. 어색해. 공백이 드디어 메꿀 수 없는 이질감이 된 걸까?"


마침내, 그들의 오랜만의 만남은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결국 둘은 같은 침대에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이 떠진 그녀는 그의 얼굴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의 눈썹.

그녀가 사랑했던 그의 안경자국.

그녀가 사랑했던 살짝 올라간 그의 입꼬리.

또 무엇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가,


그 순간 그의 눈이 떠졌다.

둘의 눈이 맞닿았다.


"나도 사랑해."

그가 작게 읊조리며 그녀를 그의 가슴팍에 끌어 강하게 당겼다.


한없이 무해한 그의 부드러움에 그녀는 조금씩 부서져갔다.




그의 집에서 보내는 주말은 머지않아 거진 매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직장을 옮기면서 이사를 해야 하게 되자 그녀에게 새로 살 집을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새로 집을 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택론을 같이 알아보게 되고, 그 타이밍에 결혼 이야기도 나왔다.


억지스러운 관계의 정의, 부자연스러운 고백이나 프러포즈 등은 일절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받은 고백에 가장 가까운 것이 이것이지 않을까.


발가락을 핥는 건,

너의 가장 낮은 부분까지 아껴주겠다는 몸의 메시지야.

너의 가장 더러운 부분까지 아낌없이 받아들이겠다는 헌신의 약속이야.


그녀는 이요한의 생각에 잠기며 푸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이후에도 그녀는 김장우를 꿈에서 몇 번이고 더 만났다.


언제나와 같이 그는 그들만 알 수 있는 손짓을 하고, 그녀의 등에 그림을 그렸다.

불완전한 원형의 자취. 끝부분이 가시처럼 돋아난 고리 모양. 말초에서 퍼져나가는 검은 물감.


그의 손길이 그녀의 등줄기에 뻗어나가는 감각이 너무 생생 졌을 때,

그녀는 이번만큼은 절대로 꿈에서 깨도 잊지 않으리라, 그 절박한 의지로 눈을 떴다.


김장우가 본인이 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몇 번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관련된 영화를 보자고 했다.


"컨택트라는 영화야. 뻔한 외계인 영화는 아니니까 벌써부터 싫은 표정은 안 해도 돼."


외계 생명체의 언어. 시간의 비선형성. 미래의 기억.


"그러니까... 모든 순간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너를 만나기 전에도 너와 함께 했고 너를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너와 함께하다는 거야."




작가의 말: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출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변함없는 남녀 사이의 사랑과 관계에 대한 진부한 진리들을 2025년도 버전으로 재해석해보고 싶었다.


그림:

Hilma af Klint No.6 Adult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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