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공기 속에는 겨울과 봄이 정확히 반반씩 섞여 있었다. 3월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듯 이도 저도 아닌 계절이었지만 앞으로 올 시간이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줄 지는 자명했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나 호된 추위 따위에 꽤 오랫동안 당했던 기억도 잊은 채 아쉽고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날 장바구니에는 마지막 겨울만 골라 담기로 했다.
현대의 시장은 언제나 계절을 두어 걸음 앞서 걷는다. 이미 봄, 아니 여름의 맛까지 선명한 빛깔로 너울거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 겨울도 조금 남아 있었다. 뽀드득한 흰색의 제주 월동무를 찾았다. 황톳빛 호박 고구마와 선명한 자색의 밤고구마도 골라 본다. 겨우내 먹던 달콤한 구좌 당근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라는 마음으로 담았다. 미리 준비한 천 주머니에 넣어 비닐 포장 없이 사서 고작 천 원짜리 몇 개로 계산했다.
집에 도착해서 먼저 무부터 손질했다. 물로 껍질을 정성껏 씻는다. 껍질은 채소의 영양이 응축된 소중한 부분이다. 제로 웨이스트 관점에서도, 마크로비오틱 관점에서도 채소를 되도록 껍질째 요리할 것을 권한다. 수분이 많은 무는 채칼로 무심하게 썰었다간 죽이 되기 십상. 칼끝에 정신을 집중해서 최대한 얄팍하게 채 썰었다.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무채에 소금과 설탕 한 자밤을 뿌려 시간이 조금 흘렀을까. 아까의 펄펄한 기운은 사라지고 얌전하게 내려앉은 무채 아래로 투명하게 물이 고여 있다. 가볍게 채반에 받쳐 물기를 빼고 이제 양념을 준비한다.
고운 고춧가루는 처음부터 많이 넣지 말고 조금씩 넣어 버무리면서 색깔을 본다. 정답은 없이 내 눈에 가장 먹음직한 붉은 빛이 돌 때가 베스트. 그다음은 다진 마늘 한 술을 넣고 매실청과 연두를 적절히 더해 은은하게 단짠 조화를 맞춰 주면 거의 끝나간다. 마지막 터치는 참깨! 참기름을 반 바퀴 쪼르르 두르는 레시피도 있으나 바로 먹을 예정이 아니라 보관용으로 만든다면 참깨 쪽이 오래도록 깔끔하다. 대신 아낌없이 와드드 뿌려서 쓱쓱 버무려주면 제주 월동무로 만든 무생채 완성. 한나절 맛이 배기를 기다렸다가 질 좋은 곱창김에 밥 한술 얹고 무생채 몇 가닥을 올려서 함께 먹어본다. 얄팍하고 오독오독한 식감 중간에 참깨 몇 개가 치아 사이에서 뭉개지면서 작고 고소한 폭죽이 소리 없이 터졌다.
지난 1월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제주도 동쪽 구좌읍에서 오래 머물렀다. ‘제주도는 남쪽이니까 따뜻하겠지?’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 차갑고 매섭던 바람과 동시에 떠오르는 건 어디든 흔하게 보이던 구좌 당근이었다. 검정에 가까운 흙과 연약한 세공품처럼 섬세하게 나부끼던 연두색 이파리들. 한데 모여 당근을 수확하던 동네 어르신들과 수확이 끝난 밭에 수북하던 파지 당근들……. 그 기억이 좋아서 집에 돌아온 후 겨우내 당근을 실컷 먹었다. 뿌듯하게 담아도 막상 저울에 올리면 속으로 에계계, 소리가 절로 나올 만치 저렴했던 건 덤이다. 이 겨울이 스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겨울 당근을 먹고 싶었다.
채소 세척용 솔로 벅벅 소리가 날 만큼 대담하게 씻는다. 검은 흙먼지를 다 씻어 내자 말간 주황빛이 드러났다. 채칼로 쓱쓱 썰자 금세 수북하게 당근 채가 쌓인다. 늘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늘 다 먹었다.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크게 한 술 넣고 슥슥 섞어 준다. 이미 단짠의 완성이다. 겨울 당근은 거짓말 아니고 정말 정말 달기에 추가로 설탕을 더할 필요가 전혀 없다. 레몬즙을 조금 넣어 맛에 상큼한 리듬감을 더할 뿐이다. 그 위에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듬뿍 넣고, 만약 집에 트러플 오일이 있다면 티스푼으로 하나 정도 넣어서 이국적인 향을 입힌다. 마지막으로 검은 통후추를 그라인더로 갸드득 갈아서 넉넉히 뿌려 주면 구좌 당근으로 만든 당근 라페 완성. 두껍지 않게 썬 치아바타 위에 당근 라페를 욕심껏 넉넉히 올려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주황빛 단맛이 퍼지는가 싶더니 씹을수록 그 아래 켜켜이 층진 예리하고 이국적인 풍미가 올라와 뒤섞인다. 그 맛을 조금이라도 놓칠까 봐 집중하며 열심히 우물거렸다.
결혼 전에는 남편과 내 식성이 이렇게 다른 줄 몰랐다. 고구마 하나만 봐도 뭐. 남편은 바짝 그을린 껍질을 벗기면 노란 김에 펄펄 올라오는 구운 호박 고구마를 좋아한다. 나는? 촉촉하게 삶은 뒤 한 김 식힌 밤고구마 파다. 고구마 역시 껍질째 먹는 게 참 맛있다. 남은 흙먼지가 없도록 꼼꼼하게 씻은 밤고구마를 찜기에 올려서 물이 끓으면 약한 불로 바꿔 20분 정도 푹푹 찐다. 시간이 흐르면 피어오르는 김에도 달콤한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거의 다 되었다는 신호다. 뚜껑을 슬쩍 열어 젓가락으로 쿡, 찍었을 때 저항 없이 매끄럽게 들어간다면 오케이. 불을 끄고 다시 뚜껑을 닫고 적당히 뜸을 들인다.
삶은 밤 고구마를 바로 먹어도 맛있지만, 조금 더 맛있게 먹는 나만의 방식은 충분히 식혔다가 먹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다음 날 상온에서 서늘하게 식은 고구마를 먹는 쪽이 내 취향이다. 살짝 서늘한 고구마를 먹어야 단맛이 그야말로 오롯이 느껴진다. 그리고 하나 더, 칼로 고구마를 작은 주사위 크기로 깍둑 썰어서 디저트용 포크로 하나씩 찍어서 입에 넣는다. 개인적으로 고구마는 앞니로 크게 베어 물어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편보다, 고급진 디저트를 먹듯 작은 조각을 맛보는 편이 그 풍미를 훨씬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고 우아한 접시에 자색 껍질이 보이는 밤고구마 큐브 몇 개를 소담하게 담는다. 작은 은색의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다. 서늘하고도 진한 단맛이 입 안에서 녹아내린다. 만족스럽게 내쉬는 숨에서도 단내가 난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봄바람이 한줄기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