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Return to Base

by 재룬

재룬입니다.


마지막화이자 에필로그까지 와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얼마 전, <여러분의 군번은 몇 개입니까?> 라고 물으며 이 일련의 이야기를 시작했었죠. 죄송합니다만, 궁금해서 여쭌 게 아니라 엉겁결에 가지게 된 3개의 군번들에 깃든 사연을 털어놓기 위한 밑밥이었습니다. 신박한 질문에 이끌려 제 작품에 잘 녹아드셨길 바랍니다.


에필로그답게 저의 첫 작품을 써오면서 있었던 썰도 좀 풀고, 다음 작품에 대한 예고의 예고 정도 한 뒤 이 이야기를 매듭지을까 합니다.


시작이 65%

먼저, 첫 문장을 쓰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브런치스토리에 작가 신청을 하고 승인받은 건 작년 11월이었으나, 첫 화를 업로드한 건 4월. 거진 반년을 우물쭈물거린 거죠. 그러나 1화와 30화 사이는 달도 안 걸렸어요. 제가 무슨 말하려는지 아실 겁니다.


역시 시작이 반이더랍니다. 위의 날짜를 토대로 정확하게 계산해 보니, 시작이 65% 정도였어요.


그 첫 발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고 손끝에 맡기니 문장들은 급물살을 타고 여러분들이 보고 계신 화면까지 꿈틀꿈틀 산지직송됐습니다. 글을 쓰다가도 점점 속도가 붙어 주 1회 연재하던 걸 주 2회로, 또 3회로 늘리기까지 했죠.(참고로 이 30화는 18화가 발행되던 시점에 완성됐답니다.)


시작해야 합니다.

운을 떼야합니다.

그래야 완성 또한 있습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글을 써온 모든 과정은 가 좋아하는 어느 노래와도 같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처음엔 '총 몇 화로 제작해야겠다' 그런 계획 없이 쭉쭉 써내려 가다 보니, 점점 기억나는 게 많아지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한 브런치북에 최대 30화까지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말미에는 분량 조절도 해야 했답니다.


병사, 부사관, 장교 3가지 신분을 거치면서 겪었던 중요한 포인트들을 추려냈고, 어느 한 구간에 분량이 몰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마치 방송국의 PD처럼 막 뭔가를 스케치하고, 갈아엎고, 또 아이템 하나 건지고. 기획이란 건 정말 즐거웠어요.


그리고 저장 글 기능을 활용해 제목 정도는 미리 지어놨는데, 제목은 최대한 지나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그리고 뻔하지 않으면서도 저와 관련 있게 지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여러 번 수정된 제목들이 많았답니다. 근데 그 고민하던 과정이 참으로 재밌었지요.


그렇게 하나씩 흐릿한 기억들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어떤 사건들과 당시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해 냈습니다. 완전히 잊고 있던 것들도 그걸 구체화하려고 더 머리를 싸매보니 그 장면들이 생생하게 살아난 에피소드가 한둘이 아니었죠. 기억이란 건 이토록 흥미롭습니다.


퇴근 후 머리가 띵하더라도 과거 어떤 시점을 떠올리며 글쓰기에 매진하고 나면, 다른 세상에 접속하고 돌아온 것처럼 신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 덕에 복잡했던 두뇌 또한 구름이 개듯 맑아져 있었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브런치라는 밀짚모자를 쓰고, 글쓰기라는 잠자리채를 들고, 내 안에 으스러진 기억의 조각들을 채집하러 떠나는 여행. 여느 최첨단 기술 부럽지 않은, 저만의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한여름밤의 시간여행이었답니다.


.. 인류에겐 아직 때 이른 가요?


본연의 맛?

어느 유명 작가님께서 그러셨죠.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대한민국만의 오리지널 콘텐츠이기 때문이듯, 글을 쓸 때는 자기만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쓰라고. 그렇지, 원조 못 이기지. 저는 동의했고, 바로 아이템 물색에 나섰습니다.


'나'의 오리지널 콘텐츠는 뭘까..

''라는 식재료가 낼 수 있는 본연의 맛은 뭘까..


저도 군대 얘기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근데 이걸 빼놓고는 저의 지나온 삶을 논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래서 군대 특유의 국방색은 최대한 빼내고, 그 속의 담백한 제 마음과 생각을 버무려 디쉬에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좀.. 맛이 잘 나왔을까요?


따라서 지루하고 진부한 문장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 스스로가 봐도 재미없는 표현은 바로 갈아엎었고, 썼던 말 또 안 쓰려고 했고, 별의별 참신한 비유를 곁들이려고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23화: 세상을 덧칠하고 싶어> 편이 쓰면서도 자꾸 새로운 표현들이 떠올라 즐거웠던 기억이 있네요. 아직 안 보신 분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한 번 잡숴들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들도 이거 알아요?

아 그게.. 사실 저는 제 자식과도 같은 이 첫 작품을 아직 가족들에게 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아들답게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 부끄럽기도 하고, 과거 잠시 입에 댔던 담배 얘기 때문에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위험도 있고, 무엇보다 세상을 등지고 먼저 떠나려 했던 이야기가 여과 없이 들어있어서 좀.. 그래서 자연스럽게 들킬지언정, 선뜻 내밀 지를 못하겠네요. 언젠가 자수하고 광명 찾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 '가족'하니까 그거 생각나네요.


집안 사정이 풍족했어도 너는 같은 선택을 했을까?


장교가 되기 직전 아버지께서 제게 편지로 물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질문 하나에 아들이 군대 3번 가는 동안 묵묵히 믿고 응원만 했던 아버지의 그 속내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처음 저 질문을 받았을 땐 '청승맞게 뭐 이런 걸 물어보시나..'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느 부모가 자식 군대 3번 보내고 싶겠습니까? 내심 내 아들이 그러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아닐까..


하지만 이제 당당히 답할 수 있습니다. 뭐 집안이 풍족? 얼마나 풍족한 걸 말씀하시는진 모르겠지만, 완전히 같은 과정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내 선택은 이것이어야만 했다고.


혹시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도 그 결이 군인과 결코 다르지 않은 로 향했을 거라고. 군대를 떠나지만, 솔직히 다른 데서도 이 일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기꺼이 희생하며 모든 걸 던질 수 있을지, 언제 그런 마음을 또 가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그 배경에는, 내가 다시 태어나도 당신 두 사람의 아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닐 만큼 존경하는 우리 부모님의 강인한 정신력과 처절했던 희생, 그 틈에서 피워낸 훌륭했던 가정교육 덕분이라고.


아버지, 이제 답변이 됐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길지도 모르지만, 저는 쉴 때 제 글을 자주 봅니다. 여자친구도 상당히 어이없어하는 부분이죠. 하지만 재밌는 걸 어떡해. 다시 읽어보면 그 글을 쓸 때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보여서 고치고, 추가하고, 문단 순서를 바꿔보고.. 그럼 더 나은 작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답니다.


제가 올해 서른인데요, 30살까지의 이야기를 30개의 이야기로 엮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심지어 이 글이 발행된 날짜도 30일. 이거 아무래도 계란 한 판 사 먹어야겠죠?


가끔 주변에서 4번째 군번도 해보라고 얘기하는데, 대위로 전역하고 난 뒤 준위로 재재재입대 할 방법이 있긴 합니다. 과거 뉴스를 보니 군번이 5개이신 분도 있더라구요. 군번 4개를 들고 <유퀴즈>에 출연하는 발칙한 상상도 해봤지만, 준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랍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고된 길임에도 간절하게 그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을 항상 응원할 것이고, 먼발치서 기웃거리는 저에게도 해보겠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자질에 대한 검증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시키는.


제3자로서 보아 온 준사관이란 그런 사람들입니다.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한다'는 뜻의 '불구(不構)하고'. 제가 과연 그분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할 수' 있을지..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Return to Base

세 번이나 들어섰던 군문(軍門). 이제 모든 임무를 마쳤으니, Return to Base. 다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3개의 군번을 가지러 모두 제 발로 들어갔듯, 나올 때도 제 발로 나오게 됐습니다. 다음엔 어떤 문을 두드리게 될까요?


글을 쓰고, 문장을 다듬고, 설레는 마음으로 발행하던 모든 순간들을 애정했습니다. 부디 그게 잘 전해졌길 바라며, 서툴렀던 저의 첫 작품, <여러분의 군번은 몇 개입니까?>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에는 좀 더 재밌게 <인간극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1.5인칭의 현장르포 장르로 어떤 인물을 묘사해 나가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데요, 어쩌면 이 작품에 제가 이 일을 그만둔 이유가 투영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얽히고설킨 알고리즘 속에서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요? 기다리겠습니다. 우리 언제 좋은 날, 좋은 글로 다시 만납시다.


재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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