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터널 애니멀스 -괴리와 회피,그리고 오독
바키미미의 영화리뷰 #1
녹터널 애니멀스(2017)
감독: 톰포드
출연: 에이미 아담스, 제이크 질렌할 등
톰 포드 감독의 녹터널 애니멀스는 관객의 각막을 후려버리는 충격적인 오프닝, 불안함과 공포, 처연함이 지배하는 중반을 지나 갑자기 찾아오는 고요가 모든 것을 지배해버리는 엔딩까지, 마치 한 땀 한 땀 세밀한 바느질을 통해 만들어낸 하나의 명품 옷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지독히 쓴 영화를 한번 곱씹어 보고자 합니다.
오프닝 – 강렬하게 상징으로
앞서 말했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각막을 후려치고 대뇌의 강렬한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이 영화의 진입장벽이 있다면 이 오프닝을 버틸 수 있냐 없냐로 판가름할 수 있을 정도죠. 물론 건너뛰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비추입니다. 영화의 인상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오프닝을 마음대로,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만드는 감독은 한 명도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도대체 이 감독은 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프닝은 간단합니다. 거의 트리플 플러스 정도의 매우(x10) 살집이 있는 여성분들이 나옵니다. 그녀들은 올누드(스트립쇼에서 일하는 여성분들이 입을만한 섹시(?)한 복장을 걸치고는 있으나 그냥 올누드)로 당당하고 도발적(?)인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추죠. 그 장면이 거의 몇 분간 지속됩니다. 관객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죠. 도대체 이게 뭐야 할 때쯤 화면은 미술 전시장으로 바뀝니다. 그 여성들의 춤추는 화면은 주인공 수잔이 기획한 미술 전시회의 전시품입니다. 그런 여성이 누워있거나 피를 흘리고 있는 동상 역시 전시되어 있죠. 그리고 그 속에서 수잔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동상 옆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수잔이 이 전시회를 굉장히 싫어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크 문화를 잘 보여준다며 전시회에 대한 칭찬을 하는 사람에게 그냥 이 전시회는 정크 그 자체, 즉 쓰레기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죠.
수잔은 자기 자신이 섹시한 몸을 가진 여성들이나 춰야 할 스트립댄스를 전혀 그렇지 않은 몸을 가지고 추고 있는 화면 속 여성들과 동일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성공적이고 대외적으로 행복해 보이는 현재 사회적 지위와 대외적인 삶(스트립댄스)과 자기 자신(그렇지 않은 몸)의 괴리감을 느끼고 있고 이 괴리감이 바로 수잔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대조적 이게도 화면 속 그녀들은 당당하기라도 하지 그녀는 그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앉아있을 뿐이라 더욱 처량합니다. 즉 이 오프닝은 수잔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문제를 강렬히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영화의 톤을 잡아가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는 잘 만든 오프닝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그녀가 왜 괴리감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이는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죠.
녹터널 애니멀스 – 그녀의 불면증
이 영화의 제목 ‘녹터널 애니멀스’는 야행성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에서 ‘녹터널 애니멀스’가 지칭하는 대상은 수잔입니다. 데이비드의 소설은 수잔과 데이비드에 관한 얘기이고 실제로 데이비드는 수잔을 야행성 동물이라 지칭한 적도 있으니까요 왜 수잔은 야행성 동물로 표현될까요? 간단합니다. 그녀는 잠을 못 잡니다. 꽤나 문제적인 불면증 환자로 보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잠을 못 자는 건 그날이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채워지지 않은 만족감이 사람이 편히 안식하는 걸 방해한다고. 저는 수잔의 불면증의 원인은 바로 결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결핍은 무엇일까요? 영화 내에서 수잔은 회상씬에 잠깐 나오는 데이비드와 누워있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밤에 누군가와 같이 있는 장면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제외하고는 밤을 누군가와 같이 보내는군요. 남편은 내연녀와, 딸은 남자 친구와. 그녀만이 홀로 밤을 지새웁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녀는 현재 인간과의 관계에서 애정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 결핍이 그녀의 불면증의 주된 원인일까요? 다시 야행성 동물로 돌아가 보죠. 야행성 동물이 주행성 동물보다 생존의 강점이 있는 건 바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밤이라는 어둠이 천적의 눈을 가려주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수잔이 야행성 동물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들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해석도 가능합니다. 뒤에 덧붙이겠지만 수잔은 실제 자신의 모습을 자기 자신도 거부할뿐더러 남한테도 들키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실제와 표면적 모습의 괴리, 그리고 실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 그것이 그녀의 불면증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영화의 본격적 내용을 살펴볼까요?
세 개의 층위 – 가상은 현재를 자극시켜 과거를 일깨운다
이 영화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총 세 가지 층위로 나눠져 있습니다. 1. 수잔의 현재 2. 수잔과 데이비드의 과거 3. 데이비드의 소설 속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이 구조가 영화의 짜임새 및 관객에 흥미 유발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이 영화의 전체적 스토리를 생각해보면 실제 내용은 낙차가 있지도, 커다란 갈등이 있지도 않습니다. 흥미 유발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층위인 소설 속 이야기는 대중이 좋아하는 스릴러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첫 번째와 두 번째 층위를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수잔과 데이비드가 실제로 겪은 일이 소설 속 이야기인가?라는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수잔이 딸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 전까지 관객은 영화를 따라가는데 계속 혼란에 빠지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효과적으로 관객을 영화에 몰입되게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합니다. 좋은 전략입니다.
이 영화의 층위 구조는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는 장치로도 기능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데이비드의 소설이 수잔의 현실에 영향을 주고 수잔이 과거를 회상하게 만듭니다. 가상은 현실을 자극시켜 과거를 일꺠우게 하는 구조입니다. 데이비드가 수잔에게 소설을 보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그녀를 자극시켜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그럼 왜 이런 일을 데이비드는 벌이고 있을까요? 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소설과 편지 –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편지를 보내다
데이비드가 보낸 ‘녹터널 애니멀스’는 소설일까요? 네, 당연히 소설입니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나오는 그 소설의 내용은 참으로 흥미롭기까지 하죠. 아마 데이비드의 소설만 영화로 나와도 꽤나 완성도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진짜 데이비드의 ‘녹터널 애니멀스’는 소설일까요? 아뇨, 이건 소설이 아니라 편지입니다. 소설과 편지의 차이는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독자입니다. 소설은 독자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린이 대상, 청년 대상처럼 어렴풋이 대상 독자를 설정할 수는 있습니다만 절대 특정 한 명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설은 없죠. 특정 한 명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은 편지입니다. 즉, ‘녹터널 애니멀스’는 소설 형식을 띤 수잔에게 보내는 데이비드의 편지입니다. 그렇기에 소설과 달리 해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설의 해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작가가 의도치 않은 해석을 내놓더라도 그건 잘못된 게 아닌 다양한 해석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발신인의 메시지를 수신인이 잘못 받아들인다면 그건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오독이며 오류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결정적 부분이자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바로 수잔이 데이비드의 편지를 철저하게 오독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롯합니다.
철저한 오독 – 이토록 이기적인
데이비드의 소설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가족 여행 중 딸과 아내가 범죄자들에게 납치, 강간, 살해당한 토니가 바비 앤더스라는 형사와 함께 그들을 찾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법의 처벌을 피하게 된 그 남자들을 직접 처단하는 내용이죠. 데이비드가 보낸 ‘녹터널 애니멀스’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닌 것을 아는 그 순간부터 관객은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상징하고 표현하고 있는가를 알아내려 합니다. 이는 수잔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여기서 수잔은 이 소설이 상징하는 것을 철저히 오독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의 의도와는 다르게 말이죠. 하나씩 살펴볼까요?
1) 수잔의 생각
수잔은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이것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데이비드-토니,
수잔과 함께 꿈꾸었던 미래-토니의 가족,
범죄자들-수잔과 데이비드가 헤어지게 된 원인인 데이비드의 연약함,
바비 앤더스-데이비드의 고통과 분노,
총-소설
이를 통해 데이비드의 소설을 풀어써보면 이렇게 되는군요. 데이비드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수잔과 함께 꿈꾸었던 미래를 잃고 고통과 분노를 안고 살아가다 결국에는 그들이 헤어지게 된 자신의 연약함을 고통과 분노와 함께 소설로서 없애버리는 내용.
데이비드는 고통받았지만 결국은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없앴고, 그렇기에 다시 수잔에게 연락을 해 이 소설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한층 더 성장한 데이비드와 현실이 힘든 수잔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해피엔딩. 그렇기에 수잔은 소설을 다 읽고 데이비드에게 소설 칭찬을 하며 만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을 겁니다. 데이비드도 그에 응했고요. 근데, 과연 이 해석이 옳을까요? 옳지 않습니다. 데이비드는 전혀 그런 의도로 이 소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2) 데이비드의 생각
데이비드는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이것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데이비드-토니,
수잔과 함께 꿈꾸었던 미래-토니의 가족,
바비 앤더스-데이비드의 고통과 분노,
총-소설
해석이 다 똑같네요? 아뇨, 하나가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범죄자들은 데이비드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게 아닌, 수잔입니다. 덧붙이자면, 토니의 딸은, 수잔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토니의 딸은, 실제로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위해 지워버린 데이비드의 자식입니다. 풀어써보면 이렇게 되겠네요.
데이비드는 수잔으로 인해 수잔과 함께 꿈꾸었던 미래와 자신의 자식을 잃고 고통과 분노를 안고 살아가다 결국에는 고통과 분노와 함께 수잔에게 소설을 쏘아보네 복수하고자 하는 내용.
수잔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군요. 그런 뜻에서 보낸 소설을 수잔에게 보냈는데 수잔은 소설 문체가 예쁘다는 둥 소설 칭찬을 하고 만나자고 하는군요. 범죄자들 중 가장 개자식이었던 레이 마커스가 끝까지 토니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수잔은 데이비드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잔은 정말 이 데이비드의 생각을 전혀 몰랐던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술관에서 수잔은 직원이 갓난아이를 CCTV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직원의 휴대폰을 통해 아기를 봅니다. 그때 레이 마커스의 얼굴이 잠깐 보여 그녀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리죠. 그녀의 무의식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겁니다. 딸을 강간하고 죽인 소설 속 범죄자는 다름 아닌 아이를 지우고 데이비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일으킨 자기 자신이라는 걸요. 그녀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철저하게 오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수잔이 가진 문제이자 한계입니다. 회피.
쓰디쓴 복수 – 약속 시간에 데이비드는
수잔의 무의식은 데이비드의 소설이 자신에 대한 복수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 겁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산 복수라고 적혀있는 그 미술작품처럼 말이죠. 하지만 의식적이든 뭐든 그녀는 그것을 회피했고 자기에게 유리 한대로 해석한 소설을 보고 데이비드에게 만나자고 합니다. 그리고 데이비드와 약속 장소로 가기 전 그녀는 화장실에서 진한 립을 지우고, 머리 스타일을 데이비드와 만나던 그때 머리스타일로 바꿉니다. 그녀는 그냥 그때의 자신으로 돌아가서 데이비드를 만나면 자신의 현재에서 느끼는 괴리감, 결핍이 모두 채워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과거 회상에서 데이비드와 같이 같은 침대에 누워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때는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그렇게 아주 기대감에 넘치는 얼굴 표정을 하고 약속 장소로 간 그녀는 그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바뀝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그 표정 속, 그녀는 이것이 그의 복수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복수는 그때야 완성됩니다. 하지만, 개운한 복수일까요? 이때까지의 글에서 저는 아주 막 나가는 해석을 일삼고 있습니다만, 더 나아가서 저는 그 약속시간에, 복수가 이뤄지는 그 시간에 데이비드는 자살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설 속 토니가 모든 범죄자를 죽인 뒤 결국 죽은 것처럼.
데이비드는 그녀에 대한 복수심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수잔에게 복수를 위해, 범죄자를 죽이기 위해 총을 당겼고,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에서 토니가 말하는 것처럼 그는 그래선 안됐고 자신의 분노를 말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거기서 데이비드는 자신의 장점인 섬세함과 배려를 모두 상실해 버렸습니다. 자신을 표현한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꿈을 가지고 쓰던 소설을 그저 복수만을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켜버렸죠. 이것은 더 이상 작가가 아닙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복수는 이뤘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에게는 죽음만이 남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복수를 끝내고 결국 죽은 토니처럼 말이죠. 도대체 왜 이런 비극이 벌어진 걸까요.
괴리와 회피 – 모든 비극의 출발
이 모든 일은 결국, 수잔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수잔은 앞서 얘기했지만 실제 모습과 표면적인 모습의 괴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 그 괴리는 도대체 뭘까요? 이는 수잔과 수잔의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수잔은 자신의 가족, 특히 어머니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혐오하고 있죠. 하지만 데이비드가 말했듯 수잔과 수잔의 어머니는 같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잔의 어머니가 말했듯 수잔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우리는 그녀가 실제로 그런 사람임을 더더욱 알게 되죠. 하지만 수잔은 그것을 한사코 거부합니다. 자신은 게이를 혐오하지도 않고, 인종주의자도 아니며, 공화당원도 아니니까요. 이것이 괴리와 회피의 문제를 낳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제적 모습(지극히 현실주의자이며 냉정한 사람)과 표면적 모습(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의 괴리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실제적 모습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분명히 ‘나약한 사람’이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분명히 ‘복수’라는 그림을 샀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분명히 직원을 자르자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는 회피입니다. 자신의 실제적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만 하고 있는 거죠. 그녀는 결국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겉으로는 친절하게 모든 것을 도와주었지만 속으로는 데이비드의 나약함을 지적하고 있었던 그녀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다른 건 어머니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수잔은 그저 회피만 하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거죠. 오히려 어머니보다 질이 안 좋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괴리와 회피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자신의 삶도 서서히 망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비극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실제적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회피하는 사람이 가져오는 건 모든 것의 파멸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에서 받은 메시지입니다.
명품 옷 – 아쉬운 측면은 있지만 결국에는 좋은
이 영화는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마치 명품 옷을 보는 느낌입니다.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죠. 디자이너인 감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비주얼리스트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단점인 스토리의 개연성 부재 측면도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스토리는 명품 옷의 바느질처럼 매우 섬세하게 마감되어있습니다. 매우 좋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일단 감독이 게이여서 그런지 게이 캐릭터 두 명이 등장합니다. 근데 저는 굳이 게이 캐릭터가 왜 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약간 붕 뜨는 느낌이랄까요. 게이라는 소재를 통해 수잔의 이중성을 좀 더 잘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잔의 남편 캐릭터도 약간은 아쉽습니다. 너무 수단으로만 기능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미 애덤스, 제이크 질렌할, 마이클 셰넌, 에런 테일러 존슨의 연기는 아주 기갈납니다. 특히 에이미 애덤스의 엔딩에서의 표정연기는 특히 압도당하더군요. 그리고 데이비드의 소설 속에서 토니의 가족과 범죄자들이 고속도로에서 마주치며 일어나는 시퀀스는 정말 관객 입장에서 불쾌함과 긴장을 동시에 주는 매우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좋은 명품 옷과 같은 영화입니다. 저는 톰 포드 영화의 감독이 너무나 기다려지는군요. 좋은 경험을 선사해준 영화입니다. 제 평점은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 충분히 수작입니다. 혹시 안 보신 분들도 오프닝의 장벽을 넘고 꼭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참. 지금까지의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은 영화 1도 모르는 무식자의 개소리입니다. 반박 시 당신이 옳고 당신의 해석이 저보다 더 근사하며 깔끔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른 영화 리뷰로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