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 -길이라는 경계 위, 원을 그리며 나아가다
바키미미의 영화리뷰 #2
노매드랜드(2021)
감독: 클로이 자오
출연: 프랜시스 맥도먼드, 데이비드 스트라탄 등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노매드랜드는 사실과 픽션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담담하지만 매우 세련되게, 건조하지만 감정을 담아 세심하고 따뜻하게 그려내는 영화입니다. 매우 담백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깊고 오래가는 맛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경계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곱씹어보며 잠시 귀를 기울여봅시다.
노매드- 삶이라는 이름의 낭만과 생존
노매드, 유목인.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옮겨 다니는 삶.
몽골의 초원이 생각납니다. 몽골의 초원에는 지금도 전통의 삶의 방식을 고수한 채 가축을 먹일 풀을 찾아 넓은 대지를 떠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머무름이 있을 뿐 멈춤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푸른 하늘과 별빛으로 가득 찬 하늘을 벗들로 삼아 흘러갑니다.
하지만 생존은 냉정합니다. 유목은 결국, 식량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대지는 넓으나 먹을 것은 없기에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생존을 위해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갈 수밖에 없는 삶이죠. 계속해서 그들은 처절한 허기와 막막한 두려움을 등에이고 흘러갑니다.
푸른 하늘, 별빛으로 가득 찬 하늘과 처절한 허기, 막막한 두려움. 매우 상반된 얘기입니다. 하지만 삶은 이 상반된 모든 것들과 함께 살아 숨 쉬어 갑니다. 삶이라는 이름에는 낭만도 생존도 존재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도 낭만과, 그리고 생존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다룬 영화가 바로 ‘노매드랜드’입니다.
경계에 걸쳐서- 다큐와 픽션, 길 바깥과 길 안의 경계
노매드랜드는 영화 외적이건 내적이건 경계에 서있는 영화입니다. 영화 외적인 부분부터 살펴볼까요? 먼저 이 영화에 등장인물 중, 주인공인 프랜시스 맥도맨드가 맡은 펀, 데이비드 스트라탄이 맡은 데이브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노매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앞에 두 명을 제외하고는 이 영화속에서 그들은 그저 그들 자신으로서 서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선 어느 위에 위치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렇기에 실제로 이 영화의 전반부는 다큐멘터리의 냄새가 강하고, 후반부는 픽션의 냄새가 강하죠.
영화 내적인 부분을 살펴보죠. 이 영화의 시작 시기는 12월, 크리스마스 즈음부터 시작해.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으로 끝납니다. 12월은 해와 해의 경계에 서있는 달이죠. 그렇기에 이 영화는 경계에서 시작해 경계에서 끝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장소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길 안과 길 바깥의 경계에 서있는 영화입니다. 길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곳입니다. 우리 누구도 목적지가 길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길을 통해 근처까지 가 길 바깥으로 나가야 있죠. 삶 역시 길이 아닌 길 바깥에서 이뤄집니다. 하지만 영화 속 노매드들의 삶은 길과 길 바깥의 경계, 그러니까 갓길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에게 머무름은 있을지언정, 멈춤은 없으니까요. 즉, 정리하자면 경계의 시기에서 경계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매력은 영화 내외적으로 경계에 서있다는 점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경계에 서있어야만 양쪽, 특히 머무름과 멈춤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테이블 두 개의 경계에 위치한 사람이 테이블 두 개에 있는 음식을 다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양쪽에서 욕을 먹을 수 있기에 몸 가짐을 조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몸 가짐을 아주 바르게 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모난데 없이, 하지만 세련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죠. 매우 훌륭한 부분입니다. 이제 영화를 본격적으로 살펴볼까요?
갓길 위의 사람들- 회자정리 거자필반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로 촉발된 경제위기는 사람들의 삶의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중, 떠도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바로 이 영화 속 ‘노매드’입니다. 누구는 경제적으로 내몰렸기에, 누구는 사회의 염증을 느껴. 가지각색의 사유로 그들은 길 바깥과 안을 오고 가는 갓길 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저, 지금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런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갓길 위에서 삶을 영위하며 때로는 만났다가, 때로는 헤어졌다, 때로는 재회하죠.
주인공 펀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해맑고 순수하고 정 많은 린다, 조금은 까칠하지만 그래도 도움에 거리낌 없는 스완키, 친절하고 로맨틱한 데이브, 산타 할아버지 같이 갓길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밥 웰스까지. 하지만 멈춤이 없는 그들은 시간이 지나 헤어집니다. 하지만 많이 슬퍼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모든 길은 다 통하기에, 가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거니까요.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후반부 밥은 말하죠.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저는 이 부분에서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불교적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고, 헤어진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난다.
이 영화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조금 보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결국 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불교적 깨달음이 묻어 있는 느낌이에요. 자연을 촬영하는 방식에서도 그런 느낌이 듭니다. 자연의 생명력, 경이로움. 그것과 합일되는 자연 속 인간. 또한 노매드들의 삶은 불교 수도승의 삶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아무튼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서 어울리고, 다시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물리적이며 화학적인 결합과 해체를 통해 이 영화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 속에서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 이 영화가 초반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중심에는 관찰자 펀이 있습니다.
그녀의 뒷모습 – 관찰자로서의 그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생각이 많이 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펀의 뒷모습이죠. 이 영화는 펀의 뒷모습을 굉장히 많이 잡는 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왜 이런 촬영을 많이 쓸까요? 펀이 바라보는 풍경 혹은 사람들에 포커스가 집중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펀의 뒤를 걸어가며 펀이 보는 것을 같이 봅니다. 즉 여기서 확대하면 우리는 펀과 같이 관찰하며 이 영화를 사람과 풍경을 즐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영화의 전반부는 펀은 지극히 관찰자 역할에 충실합니다. 마치 인터뷰어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죠.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영화 전반부가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펀과 같이 실제 그들의 삶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 보죠. 앞서 말했던 산책을 하며 사람들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만약 진짜 관찰자적 시점으로 쇼트를 잡고 싶었다면 애초에 그녀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잡으면 됐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화면은 펀의 뒷모습을 같이 잡고 있죠. 여기서 펀의 뒷모습을 자주 잡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펀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지만 우리가 보는 건 펀의 뒷모습입니다. 펀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애초에 펀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펀에 관한 이야기는 이 영화 후반부를 이끌어갑니다. 펀에 관해 이야기해 보죠.
그녀의 이야기 – 원을 그리는 삶
펀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펀은 고아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US석고에서 같이 일을 하며 같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을 암으로 잃고, 일을 하던 US석고도 경제 위기로 인해 망해버리죠. US석고의 사촌(社村) 정도였던 엠파이어는 그렇게 망해버립니다. 펀은 남편도 직장도 일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녀는 남은 돈으로 밴을 구입합니다. 그리고 집에 있던 자재들은 엠파이어에 있는 창고에 넣어버리죠. 그리고 사장에게 돈을 냅니다. 여기가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집에 있던 가재들을 창고에 넣고 길을 떠나는 장면이죠. 가재들을 돈을 내고서라도 창고에 넣었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죠.
아무튼 그렇게 미국 전역에 단기 일자리를 찾아 노매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또 헤어지며 살아가죠. 사랑이 찾아온 순간도 있었습니다. 데이브라는 남자는 펀에게 관심을 보여주었죠. 서로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데이브는 정착해서 같이 살자고 말도 해줬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노매드의 삶을 버리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엠파이어로 돌아오죠. 계절도 다시 영화가 시작했던 겨울입니다. 위상수학적으로 이 영화를 그려보면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원이 그려질 겁니다. 원.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원이라는 도형은 시작점과 끝이 이어져있으며 끊기지 않습니다. 계속 순환할 뿐이죠. 펀의 삶은 원을 그리는 삶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녀의 발자취도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중간에 어떤 할머니들과 펀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그 할머니들은 펀의 결혼반지를 보고 말하죠. 원이라는 것은 영원히 순환하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고 말입니다. 펀 역시, 자신은 결혼반지를 벗지 못할 거라고 말합니다. 펀의 삶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원을 그리는 삶입니다.
하지만 원이라는 것은 영원하지만 결국,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가까이 봤을 때 아무리 직선에 가깝게, 차라리 곡선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은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죠. 펀도 결국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을 잊지 못하고 그저 원을 그리고 도는 삶을 살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 찾아온 사랑인 데이브가 접시라는 원을 깨뜨리지만, 다시 원을 억지로 잇죠.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보는 것은 현재의 별이 아닌 과거의 별의 모습인 것처럼, 편은 과거에 있습니다. 펀은 계속 원에 갇혀 있어야 할까요?
계절은 반복되나 시간은 흘러간다 –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우리의 시간을 생각해봅시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뜹니다. 하루는 무한히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갑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옵니다. 계절은 계속 순환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갑니다. 우리의 시간은 원을 그리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나아갑니다. 우주에 있는 행성의 움직임 역시 그렇게 움직입니다. 원을 그리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로 보입니다.
펀은 노매드의 삶을 살며 자연을 봅니다. 자연을 느끼고, 자연을 즐깁니다. 저는 그렇게 하며 펀은 그 원을 그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엔딩씬을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드디어 정리합니다. 원이 나아갈 준비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던 이미 폐허가 돼버린 US석고와 그녀의 집을 둘러봅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대해 그냥 별다를 거 없는 규격 주택이었다고 했습니다만, 그녀의 집 뒷문을 열면 보이는 광활한 자연의 풍경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뒷문을 열자 정말 광활한 자연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속으로 걸어갑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미국 전역의 자연을 오고 갔습니다만 어찌 보면 집 뒷문을 열면 보이는 사막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을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고 집 뒷문을 열면 보이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겨 1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엔딩 씬, 그 사막을 바라보며 서있는 펀의 뒷모습은 이내 발길을 옮겨 프레임 왼쪽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떠납니다. 이제 그녀는 집 뒷문에서 보이던 풍경에서 벗어나 진짜 밖으로 나갑니다. 물론 그녀는 결혼반지를 계속 끼고 있듯이 원을 그리며 살아갈 겁니다. 하지만 분명 그 원은 분명 그럼에도, 조금씩이라도, 움직일 겁니다. 그녀는 그렇게 갓길의 삶을 살아갈 겁니다.
삶이라는 작품 – 그저 있는 그대로
만약 다른 누군가가 노매드의 삶을 그린다면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요? 아마 대부분, 노매드가 삶을 살며 겪는 고통과 힘듦, 슬픔, 그리고 그들을 이런 곳으로 내몬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비판. 이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그려내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프레임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을 그저 있는 그대로 오롯이 그려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이 영화의 예술성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펀이 자신의 언니를 방문했을 때 오고 가는 대화는 조금 아쉽습니다. 그 부분에서 느끼는 대화는 이 영화에서 유독 자본주의의 대한 비판의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이 영화의 전체적인 색채와는 조금 다르게 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특성을 조금 더 끌어올렸으면 어떗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초 이 영화의 기획 당시 생각대로 린다 메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였다면? 아니면, 펀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실제 인물을 찾아 그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다면? 펀이 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실존인물은 있을 겁니다.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노매드의 삶을 그려내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오히려 더욱 감동적이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다큐멘터리라면 오히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느리고 평이한 호흡으로 인한 비 대중성을 극복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데이브라는 인물이 조금 아쉽습니다. 노매드이지만 돌아갈 가족도 있고 가족과 함께 화목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부족하지는 않은 인물인 것이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고, 그런 설정이 펀의 원을 깨뜨리려 하는 역할 때문에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다른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인물들보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지워지지는 않는군요.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정말 옥석의 먼지를 찾아내는 수준으로 억지 비판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 영화가 다다른 경지는 매우 뛰어나니까요. 화면, 음악, 특히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연기는 가히 환상적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 매기는 점수는 10점 만점에 8점입니다. 이 영화는 충분히 명작에 반열에 오를만한 영화입니다. 그만큼 클로이 자오 감독의 이 영화 다음 작품이 아쉬울 따름이군요. 다음에는 좋은 영화를 가지고 오길 바랍니다. 아, 지금까지 제가 했던 해석은 영화를 1도 모르는 무식자의 개소리입니다. 반박 시 당신이 옳고 당신의 감상이 저 보다 훨씬 근사하고 다양하고 깔끔하며 멋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글 읽어 주셔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음은 ‘로스트 인 더스트’ 리뷰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