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키미미의 영화리뷰 #3
로스트 인 더스트 (2016)
감독: 데이비드 맥킨지
각본: 테일러 셰리던
출연: 크리스 파인, 벤 포스터, 제프 브리지스 등
데이비드 맥킨지 감독, 테일러 셰리던 각본의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서부 텍사스를 무대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형제들의 여정을 차분하지만 세련되게, 정중하지만 날카롭게 그려낸 멋진 영화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녔지만 곧 사라질 레스토랑의 티본스테이크처럼 육즙이 꽉 들어차 깊은 맛과 함께 뒤돌아 나오는 길에는 어딘지 모르는 서글픔을 줍니다. 서부 텍사스, 그 광활한 대지로 함께 가봅시다.
할리우드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할리우드만큼 특정 장르 자체는 잘 만드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느와르 장르는 전성기 시절 홍콩 영화계, 공포 장르는 전성기 시절 일본과 태국 영화계. 프랑스, 스웨덴, 독일, 인도,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할리우드와 부분적인 면에서는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는 영화계가 존재하고 있죠.
하지만, 어떤 나라도 따라갈 수 없는 할리우드의 독보적인 장르가 서부극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서부극은 미국 그 자체인 장르니까요. 애초에 미국 서부라는 지명 자체가 장르명에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이 장르는 그 자체로 미국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존 포드나 하워드 폭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이끌던 서부극의 황금기가 끝나고 분명 서부극은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영화 장르에 하나의 요소로서 살아갈 뿐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시대가 지나며 사람들은 더 이상 마초적인 카우보이, 보안관, 악독한 범죄자의 얘기에 큰 관심을 느끼지 못했더든요. 영화에서 해밀턴이 조사를 위해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노인들이 했던 말과 같습니다. 지금은 하루하루 은행을 털며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죠.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같은 이상한 영화가 등장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입니다. 하지만 서부극은 최근 다시 요동치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 맞는 서부극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위시한 요즘 시대의 서부극은 서부 개척시대가 아닌 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물론 서부극의 상징인 카우보이, 보안관, 무법자는 등장하지만 이제 그들은 현재를 살아갑니다. 요즘 시대의 서부극, 이른바 네오 웨스턴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낭만의 상징이었던 그들과 현대라는 지극히 비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광풍. 그것의 충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혼란과 고통. 이런 것들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서부극은 분명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요즘 시대의 서부극을 그려내기에 ‘로스트 인 더스트’를 만들어낸 ‘테일러 셰리던’ 만한 적임자는 없죠. ‘테일러 셰리던’에 대한 얘기는 뒤에서 제대로 하도록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살펴봅시다
형제는 은행을 텁니다. 그것도 텍사스에 있는 같은 은행 지점들을 털죠. 왜냐하면 그곳은 아날로그 CCTV를 디지털로 교체하는 과정 중이기에 현재 CCTV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요. 돈뭉치를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그저 달러 낱개 지폐들만 가져갈 뿐이죠. 일련번호 추척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카지노로 가져가 세탁합니다. 그리 큰돈을 털 수는 없습니다만 매우 좋은 전략이죠. 은행강도에 썼던 차는 바로 묻어버리고요. 이 영화 초 중반부까지 우리는 형제의 은행을 터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집니다. 왜 그들은 은행을 터는 걸까요?
영화는 초반에 그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길을 운전 해갈 때 영화는 지속적으로 창밖에 풍경, 특히 간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있죠. ‘주택 급매’, ‘대출’ 등등. 이를 통해 우리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중반, 그들이 은행을 터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빚을 못 갚는 바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겨줬던 농장이 은행 소유가 될 위기에 처해있거든요. 거기다가 그 농장은 석유가 나옵니다. 그 농장만 있다면, 지긋지긋한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적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은행을 텁니다.
하지만 형제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막다른 길로 달려가는 것이며, 결국 파멸로 향해갈 것이라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동생과 달리 범죄와 친숙한 삶을 살아온 테너 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이죠. “죄를 짓고 좋은 결말을 맞이하는 경우는 없다”라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역경이 있더라고 이 일은 꼭 해내야 합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죠. 마치 욕쟁이 할머니가 서빙하는 레스토랑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미디엄 레어의 티본스테이크와 감자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이것을 먹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직업을 구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동생 토비에게 레스토랑 일자리를 소개해준 웨이트리스의 말을 듣고 그냥 일을 통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텍사스의 황무지는 그들에게 은행 강도 외에 다른 직업을 선택할 자비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직업입니다.
그렇기에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와 토비가 얘기하고 있는 장면의 유리창 건너, 토비가 은행을 털러 그곳으로 향하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습니다. 옛날 서부극처럼 낭만이 있는 은행털이는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는 직업으로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를 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은행을 터는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이지요.
어쩔 수 없는 직업으로서의 은행강도, 결말이 정해진 이 직업을 담담하게 행해가는 형제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운명적인 비극으로 향해가는 비장미와 그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담담함이죠. 그런 비장미와 담담함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이 영화의 다른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대화죠.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축은 바로 토비와 테너(은행강도 형제), 해밀턴과 파커(은행강도를 쫓는 레인저)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축의 스토리 진행 방식은 바로 대화입니다. 이 영화는 은행강도를 다루고 있는 범죄 영화이지만 범죄 장면과 같은 다이내믹한 장면보다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대화들을 통해 우리가 인물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감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먼저 형제의 이야기를 살펴보죠.
토비와 테너는 형제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 둘의 성격을 알 수 있죠. 형인 테너는 거칠고 난폭합니다. 범죄에 주저함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학대를 일삼던 아버지를 죽여 감옥에 가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몇 번씩 감옥을 왔다갔다한 인물이기 때문이죠. 진정 범죄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인물입니다. 반면 테너는 매우 이성적이고 침착합니다. 은행강도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진심인 인물입니다. 감옥에 가본 적도 없고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둘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아, 이 형제는 결국 저런 본질적인 차이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겠구나. 하지만 영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이 형제에 대한 생각이 바뀝니다.
형인 토비는 정말 거칠고, 안하무인이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전과자지만 동생에 대한 사랑은 진심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것도 결국에는 가족을 위한 것이었고, 죽을 때까지 자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어머니를 이해하며, 동생의 목적을 위해서 열심히 움직이는 그런 인물이죠. 자신이 어떻게 되든 동생, 그리고 동생의 가족만은 잘 되기를 바라는 인물입니다. 테너는 분명 선량한 사람입니다만 이 은행강도의 목적 및 설계는 테너가 한 일이고, 이야기를 보면 테너도 과거 매우 거칠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가족이 생기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일은 없게 하기 위해 자기 형을 끌어들이고 막다른 길로 향해가게 만든 장본인이죠.
그렇기에 이 형제는 매우 다양한 감정을 관객에게 줍니다. 특히 깊은 형제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자질구레한 대화나 서로 어릴 때처럼 노는 장면을 바라보며 뭔지 모를 가슴 따뜻함과 슬픔을 함께 선사해주죠.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뒤집어쓰려는 형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던져줍니다. 형제를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도 생깁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축의 인물들을 알고 있거든요.
은퇴를 앞둔 해밀턴은 일평생 범죄와 싸워온 사람입니다. 총을 맞기도 했고, 많은 동료들을 잃었죠. 그렇기에 거친 사람입니다. 자신의 파트너 파커에게 인종차별적 농담을 서슴없이 던지는 사람입니다. 파커는 그런 인종차별적 농담을 그냥 묵묵하게 감내하는 침착한 사람입니다. 물론, 평안하게 정년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파커는 은퇴를 앞뒀는데도 불구하고 범죄 수사에 열심인 해밀턴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종차별적 농담도 참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거슬리죠.
하지만 영화를 바라보며,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며, 우리는 그들에 대해 이해합니다. 해밀턴에게 파커는 가족과 같은 존재입니다. 가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해밀턴에게, 일생을 범죄와 싸워온 해밀턴에게 레인저 파트너는 가족일 수밖에 없죠. 그러나 대화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그는 일생 사람과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본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이때까지 해온 것처럼 파커에게는 인종차별적 농담 말고는 우스갯소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웨이트리스에게 증거품이라고 돈을 가져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할 줄 모르죠. 하지만 그 역시 따뜻한 사람입니다. 모텔에서 티브이를 보며 사실 해밀턴은 파커와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었죠. 하지만 과한 인종차별적 농담 때문에 화난 파커는 그냥 자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뚜껑을 던지고 많이 사온 맥주를 가지고 그대로 방을 나가죠. 삐진듯한 그의 모습이 웃음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줍니다. 파커 역시 해밀턴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능력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온하게 퇴직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죠. 그렇기에 해밀턴이 형제의 동선을 맞췄을 때 인디언 함성을 진심으로 발사합니다. 해밀턴의 능력은 뛰어나고 이제 이 사건은 해결이 될 테고 그러면 해밀턴은 평온하게 퇴직하게 될 테니까요.
우리는 이 형제와 파트너에 대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클라이맥스가 슬프게 다가옵니다. 형인 토비가 동생을 위해 모든 범죄를 뒤집어 쓰려합니다. 추격자들을 혼자 상대하죠. 그리고 그 와중 해밀턴의 파트너 파커가 토비의 총에 맞아 사망하죠. 해밀턴은 파트너의 복수를 위해 토비를 죽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는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까요.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영화 마지막 테너와 해밀턴의 대화도 매우 씁쓸합니다. 해밀턴은 자신의 복수를 완성해야 하고 테너는 형의 희생을 통해 가지게 된 가족의 평안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화의 끝 이후에도 분명 비극을 향해 치달을 겁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은행강도를 통해 몇 명의 희생자를 낸 형제를 비난할 수도, 동생을 위해 헌신한 형을 죽인 늙은 은퇴한 경찰을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딜레마에 관객이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입니다. 매우 담담한 영화지만 관객은 감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우리는 진짜 비난해야 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바로 세상 그 자체지요.
영화 중 파커는 이야기합니다. 예전 이 대지에서는 인디언들이 다른 인디언들을 죽이고 착취했습니다. 소수였던 백인들 역시 죽이고 착취했죠. 하지만 서부개척시대 등을 통해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죽이고 착취했습니다. 그리고 현대는 은행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죽이고 착취해갑니다. 인간은 인간들을 창으로, 총으로, 그리고 돈으로 착취합니다. 이 착취라는 쳇바퀴는 도저히 끝나지 않고 오히려 공고해집니다.
비록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허점과 돈 많은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해 2008년 이후 경제위기는 찾아왔지만, 실제 고통을 받은 건 그저 덤덤히 자신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은행은 그저 조금 휘청이기는 했지만 국가의 돈으로 회생했고, 이제 빚을 갚을 길이 없는 사람들의 땅을 먹어가며 그들은 계속 배불리 살아갑니다. 이런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적 모순이 바로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입니다. 그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결국 거시적 관점의 사회 전체가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렇게 지속적으로 텍사스의 황량한 풍경, 비극적인 간판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 겁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형제들, 레인저 파트너들이 아닌 경제 위기의 피해를 본 텍사스를, 아니 미국을, 아니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악의적 시스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그것이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것은 이 영화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국경 3부작이라고 칭하는 테일러 셰리던의 영화들(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러너)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국경이라 칭하는 실제적, 심리적인 변방에 선 사람들이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적인 시스템 내에서 어떤 고통을 겪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선택에 내 몰리나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작품들이죠. 이 영화들을 같이 보면 더욱 폭넓은 이해가 가능해질 겁니다. 이제 ‘로스트 인 더스트’를 정리해봅시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너무나 좋은 영화입니다. 연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각본 역시 군살을 쳐내고 주제의식으로 담담히 달려갑니다. 포크음악을 위주로 사용하는 음악 역시 영화와 굉장히 잘 어울리고 촬영 방법 역시 영화의 전체적인 어조와 딱 들어맞는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볼 때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서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이것 이상 잘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군요. 테일러 셰리던의 각본 실력, 그리고 그에 맞는 촬영 및 연출을 구사하는 데이비드 맥킨지 감독의 전체적 디렉터는 이 영화가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명작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제목 부분입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Hail or High water”입니다.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로 해석할 수 있는 관용적 어구이죠. 이 영화의 전체적 색채를 잘 보여주는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봤을 때 직관적인 제목이 아니기에 “로스트 인 더스트”로 제목을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 수입 시 자주 있는 일입니다만, 아무래도 “로스트 인 더스트”는 허무주의 적 느낌만 줄 뿐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오롯이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는 생각 들지만요.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이 너무 담담한 편인 부분도 흥미 부분에서는 좀 아쉽다고는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저는 이런 담담한 흐름이 이 영화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되기에 단점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무튼 제목 정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 없습니다. 그것도 영화 잘못은 아니죠.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시대를 대표할 만한 명작이라고 생각 듭니다. 테일러 셰리던 각본의 영화 중 가장 좋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 평점은 10점 만점의 9점입니다. 되씹으면 씹을수록 참으로 좋은 영화입니다. 모든 경계에 내몰려 시스템에 휩쓸려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을 그저 응원할 따름입니다. 아, 이때까지 이 영화의 해석은 필름 끈 짧은 영알 못의 막 나가는 해석이었음을 알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새로운 영화 리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