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콜드워는 마치 깊은 향과 향취를 머금은 에스프레소 같습니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원액 그대로의 씁쓸함과 향취를 통해 관객에게 깊은 맛을 선사하죠. 먹고 나오는 길에 혀 끝에 씁쓸함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깊은 맛과 씁쓸함을 같이 음미해보도록 하죠.
콜드워- 이념, 냉전, 폴란드, 그리고 사람들
영화의 시작부터 이 영화는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조금은 익숙지 않은 악기와 노래, 폴란드의 민요를 스크린 너머 관객을 바라보며 부르죠. 물론 이 영화의 처음 설정상 폴란드의 전통음악단을 만들기 위해 취재를 다니고 있기에 그들을 바라보며 부르는 것이겠지만 처음 느낌은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부르는 느낌입니다. 폴란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명확히 표현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폴란드라는 배경, 이를 이해해야 우리는 이 영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목도 ‘콜드워’잖아요? 시대적 배경과 장소적 배경을 같이 알아보도록 합시다.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아온 국가입니다. 과거 중세에는 유목민족을 위시한 동부의 민족들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고 근세부터는 러시아의 위험에 대항하는 국가였죠. 이 영화의 배경인 1949년부터 1964년까지의 폴란드를 알려면 2차 대전의 영향을 알아야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2차 대전의 시작은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부터 시작하죠. 빠른 시간 내에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간 폴란드는 유대인 학살의 대표적 무대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학살 지역, 아우슈비츠가 바로 폴란드에 있는 도시죠. 그렇게 나치의 지배시대가 끝나니 이번에는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갑니다. 세계를 뒤덮었던 적색의 파도에 휩쓸려버리게 된 거죠. 이 영화의 배경은 바로 소련의 영향에 있던 폴란드를 그립니다. 그리고 독일을 중심으로 그어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념의 핏빛의 격전지중 하나가 되죠. 냉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주축국의 지배를 받다 2차 대전 이후 이념의 격전지, 냉전의 무대가 됐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역사가 떠오르기에 폴란드의 분위기와 시대적 정신을 읽기에 수월할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했을까요? 일단 첫 번째로 이 영화가 파블로코프스키 감독의 부모님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입니다. 실제 부모들이 살았던 시대가 바로 이 시대기 때문에 냉전시기를 다루는 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을 냉전으로 비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냉전과도 같다.’라는 모티프가 이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생각이 되는군요. 냉전은 실제 무력 사용이 절제된 상태에서 두 진영의 갈등이 오고 갔던 시대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남녀의 감정적 갈등과 긴장관계로 대치되면서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즉, 지금까지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서 설명드렸지만 이것은 그저 장치일 뿐 이 영화는 지극히 그저, 사랑 얘기입니다. 이제 이 사랑 얘기를 같이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사랑, 그 씁쓸함에 대하여- 전쟁 같은 사랑
이 영화는 연도에 따라 영화의 내용을 구분 지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1949년부터 1952년, 2. 1954년부터 1957년, 3. 1959년부터 1964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죠. 한 부분씩 그들의 얘기를 따라가 봅시다.
(1)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빅토르, 이레나, 카치마레크는 폴란드 전역을 다니며 민요를 수집하고 녹음하고 다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폴란드를 알릴 수 있는 폴란드 전통 음악 공연단을 만드는 것이죠. 그렇게 수집을 끝내고 공연단을 만들기 위해 오디션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오디션에 줄라가 참석합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줄라는 민요를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디션에서 산악지역 민요를 부른 것도 그저 옆에 있던 소녀를 따라한 것이고 독창을 해보라고 하니, 러시아어 노래 ‘심장’을 부를 뿐이죠. 하지만 빅토르는 그런 줄라가 눈에 밟힙니다. 그렇기에 합격시키고 계속 자신의 시야에 두죠.
1951년이 되면 빅토르와 줄라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공연단의 무대는 성공적이었고 그들도 숨어서 밀회를 즐기죠. 하지만 줄라는 빅토르를 관찰하는 스파이적 역할을 카치마레크에게 맡은 상태였습니다. 공산주의의 삼엄한 사회 분위기에서 줄라와 빅토르의 사랑은 참으로 방해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죠. 그렇기에 52년 동독에서 그들은 프랑스로 도망치려 합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빅토르는 기다렸지만, 줄라는 오지 않았죠. 그렇기에 빅토르는 혼자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자유주의의 세상이었죠.
(2) 1954년부터 1957년까지
빅토르는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합니다. 레 클립 스라는 재즈클럽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죠. 그런 그는 54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을 하러 온 그녀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을 진한 키스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죠. 하지만 같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 인생 최고의 그녀와의 사랑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55년 유고까지 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의 무대를 보러 가기도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죠. 하지만 줄라도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는 없었고, 57년, 영화음악감독이 된 빅토르를 직접 찾아갑니다. 이탈리아 사람과의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해서 프랑스 파리로 올 수 있었죠. 그들은 드디어 사랑을 이루고 같이 동거합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갈등합니다. 음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죠. 그렇기에 줄라는 빅토르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시 폴란드로 떠납니다. 하지만 빅토르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고, 같은 망명자들을 고발하기까지 하며 폴란드로 다시 갑니다.
(3) 1959년부터 1964년까지
하지만, 빅토르는 결국 조국과 이념을 등지고, 프랑스로 망명했던 사람. 그렇기에 수용소에 수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줄라는 그를 찾아가고, 그에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를 빼내 주겠다고 다짐하죠. 그렇게 1964년이 되고 빅토르는 수용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줄라가 카치마레크와 결혼했기 때문이죠. 카치마레크는 폴란드에서 꽤나 거물급 인물이었고요. 그렇게 그들은 재회하고, 둘이 폐허가 된 성당으로 도망칩니다. 영화 초반 카치마레크가 봤던 그 성당으로요.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진정한 결혼을 하게 되고, 동반자살을 하기 위해 약을 먹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있던 그들은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영화는 끝납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어졌다 헤어졌다, 사랑했다 싸웠다 하는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이해하기는 꽤나 어렵죠.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심리를 따라가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들의 서사를 쭉 따라가지 않고 순간순간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그 순간의 간격에서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심리가 점프를 한다고까지 느낄 수 있죠. 특히, 이 영화가 빅토르의 시점으로 흘러가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줄라의 심리를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그리고 그들이 왜 이어졌다 헤어졌다를 반복하게 됐는지 알려면 우리는 줄라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줄라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주목해야 하는 장치는 바로 음악입니다.
민요에서 재즈까지- 순수성의 상실
이 영화는 음악영화적 요소가 강합니다. 그리고 줄라와 빅토르, 특히 줄라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굉장히 좋은 단서를 제공해주는 좋은 서사적 장치 기능을 하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빅토르와 줄라의 관계가 그토록 전쟁과도 같았던 건 바로 줄라가 가지고 있는 순수성에 있습니다. 빅토르와 줄라의 관계에서 줄라는 자신의 순수성이 계속 더럽혀졌다는 부분에서 이 관계가 이토록 어려웠던 근본적인 문제가 된 것이죠.
민요는 그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혹은 노동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불러왔던 것들입니다. 줄라가 오디션장에서 불렀던 러시아어 노래 ‘심장’도 그저 줄라가 너무 좋아해서 불렀던 노래였죠. 민요와 러시아어 노래 ‘심장’은 음악 본연의 기능에 충실합니다. 즐기기 위한, 유희로서의 노래죠. 순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적으로서의 음악입니다.
하지만 민요도 ‘심장’도 폴란드의 국가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공연단이 무대에서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순수성을 가지고 있던 음악은, 외교를 위한 수단으로써 격하됩니다. 거기다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노래까지 부르게 됩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음악이 가지고 있던 순수성을 상실시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달랐을까요?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악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한번 격하됩니다. ‘심장’은 프랑스어로 번역됩니다. ‘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 같은 감성팔이 가사를 가지게 됩니다. 번역한 사람은 이탈리아에 가본 적도 없지만 이탈리아 여행기를 쓴 시인이죠.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음악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빅토르와 줄라가 갈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줄라는 음악입니다. 그저 목적으로서의 ‘음악’이었던 줄라가 공산주의, 자본주의라는 이념 때문에 계속 순수성을 잃게 된 거죠. 그리고 그 순수성을 잃게 만든 건 바로 빅토르입니다. 빅토르는 민요를 무대에 세웠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공산주의의 선전 도구로서 음악을 만들었으며, 파리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잘 팔기 위해 다시 한번 음악의 순수성을 상실시켰습니다.
하지만 빅토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이념의 시대인걸요. 이념에 따라,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 음악을 이용하는 것을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바닥에 땅을 딛고 살아가는 빅토르와 물에 떠있듯, 이념에 그저 떠있을 뿐, 순수성을 지키고 싶은 줄라가 달랐던 것뿐이었습니다. 그저 냉전이, 시대가, 그들의 차이점이 그들의 사랑에 시련을 줬던 것이었죠. 이 근본적 차이가 바로 그들의 사랑이 냉전에 빗대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냉전 시기 이념 갈등이 인간의 삶을 파괴했든 빅토르와 줄라의 사랑은 크게 보면 이념이 파괴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렇기에 결말에서 그들은 동반자살을 선택한 겁니다. 이념의 시대에서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뤄질 수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동반자살에 성공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결말의 연도인 1964년은 통킹만 사건이 일어난 연도입니다. 베트남 전쟁, 냉전의 결정판도 같은 사건이죠. 저는 1964년을 일부러 결말의 시대로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냉전과도 같은 사랑, 사랑과도 같은 냉전은 죽음으로서 끝나지 않고 더 큰 갈등을 일으키게 될 거라고 알려주는 장치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마지막에 그들은 컷을 벗어났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후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감독이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표현했듯, ‘최고의 커플이었지만, 최악의 커플’인 그들이 됐을 겁니다. 싸우고 만나고, 다시 갈등하고를 반복하며 살아갔을 거라는 거죠. 정말 전쟁과도 같은 사랑 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얘기- 시대와 사람을 다루는 방법
저는 이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은 바로 시대는 그저 배경과 그들의 사랑을 빗대기 위한 장치로 기능될 뿐, 중요한 건 그들의 사랑, 즉 사람에 주목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하게 설명해볼까요?
우리가 한국의 근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 얘기를 만든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요? 저였으면 그들의 사랑 얘기를 통해 한국의 근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그들의 사랑 얘기가 장치이고, 시대적 배경이 중심에 서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역동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들 대부분이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죠.
우리가 처음 폴란드에서 나온 ‘콜드워’라는 영화를 보게 될 때 기대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줄라와 빅토르의 사랑 얘기는 그저 장치 일 뿐, 그들의 사랑 얘기를 통해 폴란드의 시대적 아픔을 그려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저 그들의 사랑을 계속 주목하며 우리의 기대를 멋들어지게 배신합니다.
마지막 배경인 1964년의 자막이 나올 때 장소 배경이 적히지 않는 게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군요. 이 영화의 처음 1949년 폴란드라는 자막이 뜨고 폴란드 민요로 시작할 때 우리는 당연히 1949년(시대적 배경)과 폴란드(장소적 배경)에 주목해서 영화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영화에서 시대와 장소는 그저 배경일뿐, 그저 사랑 영화라는 걸 알게 되고, 마지막에 1964년은 장소 배경을 없애버리고, 심지어 민요로 대표되던 폴란드, 재즈로 대표되던 파리에서 벗어나 멕시코 음악으로 시작되죠. 즉, 배경에 매몰되지 말고 그들의 사랑을 봐라라고 감독이 만들어낸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배경이 가지고 있는 강한 매력에 매몰되지 않고 사랑 얘기를 만들어내고, 시대적 배경을 비유의 대상으로 사용하여 얘기에 대한 완성도를 더욱 높인 파블리코프스키의 ‘콜드워’는 그렇기에 굉장히 잘 만든 영화입니다.
35mm와 콘트라스트- 클래시컬한 세련됨
그리고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바로 감독의 연출과 촬영 능력도 한몫합니다. 이 영화의 연출의 특징은 바로 35mm 필름 시대의 화면비인 1.33대 1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흑백영화라는 두 가지 측면입니다.
1.33대 1은 현대의 화면비율보다 가로 비율이 작습니다. 가로가 길수록 움직임에 따라 동적인 화면을 촬영할 수 있는 데에 비해서 1.33대 1은 정적이지만 피사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화면인 거죠. 인물에 집중하고 있는 이 영화의 특징을 비쳐볼 때 1.33대 1을 사용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인물에 집중하기 위해서 주변 인물의 서사를 지워버리고, 영화의 서사를 장면 장면을 통해 그려낸 것도 인물에 집중하기 위한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피사체를 정중앙에 두지 않고 의도적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쳐 촬영하면서 그들의 심리상태를 나타낼 수 있었고, 그렇기에 클래시컬한 화면비율에서도 세련되게 촬영할 수 있었죠.
흑백 화면을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흑백 화면은 콘트라스트의 차이가 굉장히 눈에 띄게 되기 때문에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강하죠. 이 영화가 결국 빅토르와 줄라의 사랑과 갈등을 그려내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본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봤을 때,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 화면을 쓴 것 역시 좋은 장치입니다. 좋은 이야기와 좋은 촬영, 최고의 영화의 밑바탕이죠.
정리하자면 파벨 파블로 코프스키의 ‘콜드워’는 대단한 영화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좋은 영화입니다. 거기에 줄리 역할을 맡은 요안나 쿨릭의 완벽히 계산되면서도 매력적인 연기는 이 영화를 어느 수준의 경지에 올려놓기에 충분한 영화였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9점입니다.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명작으로 충분합니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쉬울 정도군요.
저의 ‘콜드워’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아, 이때까지의 글은 영화를 1도 모르는 영알 못의 막 나가는 해석이었음을 알립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의 영화에 대한 생각과 해석이 저보다 훨씬 뛰어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글 읽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른 영화 리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