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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tyle by AK May 21. 2023

실리콘 밸리의 피아노 선생님


문 앞에서 금발에 핑크빛 티를 입고 있는 귀염둥이 아리엘이 작은 손을 격하게 흔들며 나를 반긴다. 반가워서 함박웃음으로 하이~~ 하며 손짓해 주는 나를 보며 푸하하하하, 푸하하하 뭐가 좋은지 몸을 굽혀가며 소리 내어 웃는다. 오늘도 이렇게 나의 레슨은 시작되고 있다. 나는 일주일에 5일, 이 실리콘 밸리에서 피아노를 가르친다.


나의 학생들은 주로 스탠퍼드 대학교가 있는 팔로 알토와 그 아랫동네인 로스 알토스에 살고 있다. 나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학생들의 집으로 가서 피아노를 가르친다. 처음에 그렇게 시작을 했더니 저절로 그 방향으로 학생들이 늘어났다.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거대 IT 기업들,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을 반영하듯, 나의 학생들의 부모님은 거의 모두 IT 기업에 종사하거나, 의사 변호사, 교수등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인종의 비율은 10년 전만 해도 백인이 60%였는데 지금은 약 30% 정도를 웃돌며, 중국인과 인도인이 대부분이다. 나의 학생들의 분포도는 실리콘밸리의 미니어처 실사판인듯하다.


맨 처음 미국에 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 실리콘 밸리이고 이곳에 26년 넘게 살다 보니 강산이 2, 3번은 족히 변했다는 느낌이다. 그 변천사를 고스란히 느끼고 보고 실제 체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교통, 주택 가격, 생활환경, 물가, 도시 모습등 여러 면에서 이곳은 격변을 거듭했다. 2000년 IT 버블이며, 구글, 페이스북, 애플의 고용 확대로 인한 인구 증가, 그에 따른 교통과 주택 문제, 고연봉으로 치솟는 물가 등 실리콘 밸리에서의 1996년과 2023은 마치 한 세기를 능가하는 차이가 있는 느낌이 든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부모님들도 이미 세대교체를 했다. 내가 2007년에 가르친 학생들이 이미 의사, 디자이너가 되어있으니 말이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부모들은 사고방식, 매너, 가치관에서도 이전 세대 부모들과 많이 다르다. 또한 미국인과 인도, 중국인들의 인종간 문화, 가치관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가끔씩 예전이 많이 그립다. 매우 따뜻하고 예의 있고 품격 있던 예전 세대 부모들이 생각날 때면 '나도 이젠  나이가 많이 들어서 같은 세대가 더 그리운 걸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근사하고 멋진 젊은 부모들이 아직도 예의 있고 다정하고 인성도 좋지만 뭔가 새로운 세대의 칼칼함이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다른 느낌이다. 마음을 완전히 연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잘못되면 따지고 넘어갈 것 같은, 아니면 이유불문 손절할 것 같은 살짝 깍쟁이 느낌이다. 지난 세대 부모들과는 누가 뭐래도 내 편이 돼줄 것 같은 '마음 터놓음'이 서로에게 형성되었던 것 같다. 이게 세대차이자 문화차인 걸까?


나는 한국에서는 영어교육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32세 때 세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미국에 와보니 영어를 전공한 사람과 한국어를 전공한 사람이 미국에서는 가장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홈리스 피플도 나보다 영어를 잘하고 내가 어쩌다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다시 묻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창피한 마음에 한국어나 무용을 전공했다고 장난처럼 말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4년이나 전공을 하고서도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고 급기야 우리 학교 영어교육과 교수진에게 원망의 화살을 쏘아대기도 했었다. 우연한 기회에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자 대학에 들어가고 지도 교수님의 권유로 생각지도 않았던 대학원까지 마쳤다. 이 두 번째 배움의 시절은 절대적으로 나의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는 음악의 깊은 심연에 빠져들었고, 심취했으며,  음악으로 인해 나의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웠다.


학교 다니는 내내 피아노 선생님이 되는 일에는 관심이 1도 없었다. 피아노가 좋아서 심취했던 학창 시절동안 말귀도 잘 못알아듯는 꼬맹이들을 가르치는 나를 그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도저히 관심이 없을 것 같았던 '피아노 선생님되기'는 나에게 뜻밖의 행복과 활력, 기쁨을 주는 직업이 되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바카스이자 커피이다. 없던 기운도 벌떡 생기는 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인 것 같다. 피아노를 잘 치던 못 치던 한 아이 한 아이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이쁘다. 피아노 선생님이 내 천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덕분에 나의 지난 18년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게다가 실리콘밸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실리콘밸리 특수'의 색다른 경험을 통해 내 인생의 명예로운 직업이 되기까지 했다. 구글의 창업자들과 유튜브 CEO 등 특별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부모와 아이들과의 교류를 이어가는 즐거운 보너스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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