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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tyle by AK Oct 04. 2024

여행, 와인, 그리고 음악

이 세 가지는 우리 부부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단어들이다. 이제는 은퇴를 앞두고,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이 세 가지에 집중하게 될 것 같다. 남편과 나는 서로 만나기 전부터 여행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내가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혹은 여행만 가면 싸우게 되는 사람과 결혼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만큼 여행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남편을 나의 ‘완벽한 여행 파트너’로 만난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남편과 나는 일상생활보다 여행지에서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즐겁고, 서로에게 재미를 느낀다.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일상이 너무 평범한 걸까?  확실한 건, 이 세상에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 매력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여행은, 결국 삶을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열쇠니까.


스티븐과 나는 주로 느긋한 여행을 즐긴다. 한때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부지런히 나가서 종일 돌아다니고, 밤에 돌아와 곯아떨어지는 여행 스타일도 해봤지만, 이제는 그런 틀에 짜인 여행보다는 여유로운 여행이 더 좋다. 그렇다고 휴양지에서 종일 바닷가에 누워 있는 여행도 내 취향은 아니다. 우리는 즉흥적인 요소도 좀 가미하면서,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또 때로는 휴식도 즐길 수 있는 ‘짬뽕 스타일’의 여행을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둘 다 패키지여행을 극혐 한다.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긴 여행을 한다. 내 학생들의 봄방학이 있는 4월에 우린 유럽이나 미국의 여행지로 3주에서 4주가량 여행을 한다. 그리고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은 알래스카로 매년 여행을 간다. 알래스카 여행은 남편 가족의 전통이기도 하다. 남편이 젊을 때부터 시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33년을 매년 알래스카에서 한달살이를 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011년부터 내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우리는 매년 가서 그저 연어 낚시를 하고 같은 곳을 방문하는데도 이 여행이 늘 즐겁고 기대가 된다. 전에는 남편의 친구가 은퇴 전까지 알래스카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요트에 몸을 싣고 주말마다 여행을 다녔었다. 항상 Whittier에서 프린스 윌리엄사운드 바다를 떠 다녔는데, 그 기막힌 추억은 그 어느 여행 경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가장 좋았던 여행을 꼽으라면, 단연 3년 전 여름의 35일간의 유럽 여행이다. 독일에서 시작해 룩셈부르크,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까지 많이 다녔지만, 그 여행이 특별했던 건 단순히 많이 돌아다닌 것 때문이 아니다. 물론 숨겨진 작은 마을을 찾는 기쁨도 컸지만, 우리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특히 스티븐의 독일 친구가 사망한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의 지인들을 만나며 나눈 따뜻한 순간들은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피에르, 피터, 일세, 씨기, 르나테 같은 사람들은 배려와 친절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다. 에어비앤비 주인이었던 디디에와 세버린, 미케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소중한 인연이다. 특히 미케의 영감 가득한 이야기는 며칠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흥미로웠다. 덴마크에서는 스티븐의 오랜 친구 올레를 다시 만났는데, 그의 아름다운 인격과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올레가 결국 암으로 숨을 거둔 것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 후였는데, 그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슬픔이, 다시는 그를 볼 수없다는 안타까움이 말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사람들로 인해 감동받고, 치유받은 최고의 여행이라는 것에는 그동안 수없이 여행을 한 남편도 주저 없이 이 여행을 최고의 경험으로 꼽았다.


와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스티븐은 와인에 일가견이 있는 진정한 와인 코이노서이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와인의 세계에 눈을 뜬 ‘서당개’ 일뿐이지만, 다행히 우리 둘의 와인 입맛은 잘 맞아서 함께 즐길 줄 안다. 스티븐 덕분에 특이하고 재미있는 와인 경험을 많이 했고, 이를 바탕으로 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와인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여행을 할 때마다 와인 산지를 꼭 포함시키는데, 지난 여행에서 프랑스의 샴페인 지역과 독일의 프랑켄과 리즐링 와인 산지에서 보고 마시고 배운 것이 오래도록 남았다. 우리는 집에서 2시간 반 거리의 나파밸리에도 자주 가는데, 특히 남편의 오랜 친구가 롬바우어 와이너리 오너였던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 와이너리가 갤로 그룹에 매각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롬바우어 와인의 멤버로 가입해 좋아하는 와인을 받아 마신다. 남편은 젊을 때부터 와인을 수집해 왔고, 그 덕분에 우리 집에는 수백 병의 와인이 있다. 아주 오래된 빈티지 와인도 마셔보며, 실수와 실험을 통해 와인을 즐기는 방법도 터득했다. 와인잔의 모양에 따라 달라지는 맛, 지역마다 미묘하게 다른 와인들을 테이스팅 하는 즐거움도 크다. 와인에 대한 스티븐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우리 역시 계속 와인을 모으고, 마시며 그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다행히도 남편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좋은 귀를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클래식 음악을 거의 듣지 않지만, 음악회에 함께 가면 진심으로 즐긴다. 남편의 귀가 워낙 예민해서, 잘 연주된 곡과 아닌 곡도 단번에 구별해 낸다. 하지만 그에게 오페라를 가자고 하면, 노노, 절대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남편이 오페라를 싫어하는 바람에, 오페라를 안 본 지 정말 오래됐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일 년에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 음악회를 보러 가며, 특히 크리스마스 즈음엔 반드시 음악회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 주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을 찾곤 했는데, 매년 거의 비슷한 레퍼토리 때문에 조금 식상해져서 요즘은 뮤지컬을 더 자주 본다. 한 해는 유명한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본 적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서부 지역에서 꽤 훌륭한 오케스트라이다. 특히 마이클 틸슨 토마스(Michael Tilson Thomas)가 음악 감독이었을 때, 내가 한창 음악을 공부하던 시절이라 더욱 열심히 음악회를 다녔다. 최근에는 에사-페카 살로넨(Esa-Pekka Salonen)이 지휘자로 바뀌었지만, 팬데믹 이후에는 음악회에 덜 가게 된 듯하다. 그래도 세계적인 솔로이스트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아서 여전히 자주 가고 싶은 곳이다. 무엇보다 이 오케스트라보다 더 훌륭한 선택지가 없으니, 다른 대안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가끔 LA 필하모닉도 보러 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LA 필하모닉의 음악이 더 마음에 든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오케스트라나 음악회를 꼭 찾으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멋진 기억이 참 많다. 뉴욕에서는 필수로 뉴욕 필하모닉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가야 하고,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빼놓지 않는다. 한 번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피카딜리에서 레미제라블 뮤지컬을 본 적이 있는데, 시차 때문에 공연 중에 꼬박~하고 졸다가도, 무대 위 멋진 금발의 남자 배우들 덕분에 눈이 번쩍 떠지곤 했다. 이 남자 배우들 덕에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봤던 기억이 난다. 레미제라블에는 정말 멋진 남자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고성에서 열린 모차르트 연주회도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약 30명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오래된 성의 화려한 방에서, 모차르트 시대의 복장을 입고 가발을 쓴 연주자들이 현악 4중주로 Eine kleine Nachtmusik을 연주했는데, 이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또, 몇 년 전 밀라노에서 라 스칼라(La Scala) 오페라 극장의 공연 표를 예매해 베를리오즈의 Les Troyens를 관람한 적도 있었다. 버킷 리스트였던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극장에 발을 디딘 순간의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의 여행, 와인,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와 죽이 잘 맞는 남편과 함께 이런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게 큰 감사이자 위안이다. 앞으로도 우리의 인생 여정이 여행, 와인, 그리고 음악으로 인해 더 풍성하고 충만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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