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
우치다테 마키코의 소설, '곧 죽을 거니까'는 젊음을 향해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늙은 티를 내지 않으려는 주인공 하나여사가 삶의 아픔과 배신을 겪으며 성장하는 노인 성장 소설이다. 보이는 외모를 꾸미는 것을 빼고는 '곧 죽을 거니까' '난 늙었으니까'라는 모토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던 하나 여사, 그러나 외모만큼은 10살이나 어려 보이는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할머니로 살고 싶던 하나여사의 이야기이다. 남편이 30년 넘게 두 집 살림한 것이 그가 죽은 뒤 알려지는 바람에 하나여사는 지울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배신과 충격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착한, 아니 착했다고 여겼던 남편 이와조의 첩과 그 아들과의 내키지 않는 만남을 갖게 되며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 나이에도 성숙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참신하다. 결국 본인도 나이 들고 있음을, 쇠퇴해 감을 인정하고, 주변 가족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되고 사람의 폭이 넉넉해져 간다. 외모의 젊음을 향해 발버둥을 치던 하나여사가 서서히 품격 있는 쇠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 온 지 오래되었지만, 처음 미국에 와서 이곳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처신과 행동, 그리고 마음가짐을 보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늘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은 우리 부모님 세대, 우리 삼촌 이모 세대가 진정한 노인세대가 되어 버렸지만, 내가 젊었을 적 27년 전에는 내 조부모님과 그 나이 주변의 연배 분들이 노인이셨다. 그 당시 노인분들 중에는 '난 늙었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아, '라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던 분들이 참 많았다. 남이 뭐라 하던 남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많은 노인들이 법과 질서(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상식에 반하는 일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시던 세대셨다. 젊었던 나는 그게 무척이나 싫었던 모양이다. 동네에서 아무에게나 경우 없는 말을 하거나, 신호등도 잘 지키지 않고 막 건너면서 '나는 늙었으니 너희가 비켜라'며 밀고 나가는 식의 행동은 비단 신호등을 건너는 일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늘어진 누런 러닝셔츠와 후줄근한 반바지 바람으로 동네를 누비시는 할아버지들이며 어떤 장소든 두셋이 모인 아주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은 창피한 줄 모르고 아무 말이나 큰소리로 떠들곤 했다.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다가 미국에 건너와 미국의 노인들을 보니 이건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첫 미국 할머니의 모습은 하얀 백발에 얼굴도 하얗던, 곱게 연세 드신 할머님의 연보라색 스웨터였다.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연 보라색 스웨터를 입고 계신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도 이렇게 곱고 품격이 있을 수 있구나!' 첫인상이 이랬다. 그 이후로 노인들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건 아마도 첫인상의 충격으로 미국 노인들에 대해 알고 싶어 졌던 모양이다. 그렇게 시작된 노인 관찰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나도 이러이러한 노인으로 늙고 싶다는 롤모델을 만들어야 할 나이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롤 모델을 만났다.
옆집 할머니 앤은 올해로 90세이시다. 우리 부부가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이 12년 전이니 앤이 78세 때 만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겐 그저 할머니이지만 그동안 앤은 '품격 있는 쇠퇴'를 해 오셨고 여전히 멋지게 살고 계시다. '품격 있는 쇠퇴'란 자신이 쇠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나이 들었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노년의 삶이 아니라 젊은 사람 못지않게 의식과 상식을 가지고 사는 삶이라고 나는 정의하고 싶다. 미국 노인들 중에는 자신이 쇠퇴하고 있음을 선택적으로 인정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일례로 우리 시어머님은 92세에 넘어지시는 바람에 엉덩이 뼈가 부서져서 수술을 하시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셨다. 워낙 강골이라 그 뼈가 그 연세에도 다 붙었는데, 그래서 걷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런데 좀 위험한 구간에서 부축을 하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화를 내며 거부하셨다. 수퍼 최강 효자였던 남편은 나에게 부축을 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할 정도였다. 자신이 이젠 연로했고 때로는 부축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더 자존감 있는 모습이라는 걸 모르셨던 모양이다. 이렇게 미국 노인들 중에는 자신의 쇠퇴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앤 할머니는 다르다. 자신이 쇠퇴하고 있음을 깨끗이 인정한다. 얼마 전에도 자신이 오래 여행할 체력이 되지 않는다며, 손녀의 결혼식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극진히 사랑하는 손녀의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면 자식들이 신경을 쓸 테고, 그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가지 않으신 것이다. 앤은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품격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나의 시어머님은 정말 특이한 분이었다. 미국에서도 보기 드문 자식 의존형, 그야말로 자식에게 민폐를 끼치는 스타일이었다. 앤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삶을 사신 분이었다. 어떻게든 자식에게 의지해 살아가고 싶어 하셨고, 그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셨다. 엉덩이 뼈 수술 후 요양 병원에 계셨을 때는, 혹시나 자신을 요양원으로 보내버릴까 봐 간호사와 간병인을 때리고 물건을 던지며, 심지어 밤에는 알몸으로 병원을 돌아다니는 등 이상 행동을 하셔서 결국 쫓겨나시는 ‘쾌거’를 이루셨다. 결국 우리 집에서 사시게 된 모습을 보고 앤은 시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앤의 눈에는 우리 남편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고, 남편이 결혼 서약을 지키지 않고 어머니를 우선시하는 것에 안타까워하셨다. 남편의 엄마를 우선시하는 모습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던 나에게 유일한 내편이 되어준 분이 앤이었다. 사실 나도 시어머니를 제외하고 이렇게 의존적인 미국 노인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미국 노인들은 매우 독립적이며, 특히 자식에게 신세를 지거나 불편을 주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많은 경우, 딸들이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케어 강도가 심해지면 결국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앤은 노후 준비를 정말 철저하게 해 두셨다. 많은 노인들이 그렇듯이, 앤도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불가피한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혼자서 자신이 정든 집에서 살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이미 방 하나를 도우미가 살 수 있도록 꾸며놓고, 필요할 때는 전문대학에서 학생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모든 리소스를 준비해 두셨다. 이 도우미들은 거주 공간과 최소한의 월급을 받으며, 반나절만 간병하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윈윈 시스템이다.
그뿐만 아니라, 앤의 현재 모습도 정말 본받을 만하다. 앤은 스포츠 광이어서 야구, 농구, 풋볼을 여전히 즐겨본다. 우리와 함께 보기도 하고, 친구들, 심지어 이혼한 아들의 전처와도 스포츠 경기를 본다. 정치에도 밝아서 주요 이슈들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우리와 정치적 견해도 맞아 함께 토론할 때마다 매우 흥미롭다. 친구들도 많아서 일주일에 한 번은 멕시칸 트레인이나 카드 게임을 한다. 언제 함께 저녁을 하려고 해도 미리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싸 할머니다. 아들의 이혼 후에도 전처가 여전히 앤을 잘 챙길 정도로, 시어머니로서의 역할도 성공적으로 해내신 분이다. 앤은 그야말로 삶을 현명하게 준비하고, 풍성하게 살아가고 있는 분이다.
앤 할머니는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쓰시는 분이다. 늘 화장을 하고 다니시고, 파자마나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이웃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을 정말 혐오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잠깐이라도 밖에 나갈 때는 제대로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 혹시라도 들키면 안 되니까. 어머니날이나 생일, 저녁 초대, 교회 가는 날 등 특별한 날이면, 예쁜 귀걸이, 목걸이, 스카프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으시고, 아이섀도와 마스카라를 한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오늘 어디에 간다고 자랑하시며 집을 떠나신다. 그리고 직접 운전까지 하신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앤 할머니의 음주 습관이다. 예전에는 여름마다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인 모히토를 즐기셨다. 여름이 되면 민트와 바질을 화분에 심어, 그걸로 모히토를 만드셨다. 하지만 나이가 드시면서 위장이 약해지셔서 매운 것이나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시게 됐다. 그래도 여전히 와인은 즐기신다. 우리 부부와 자주 앤 할머니의 뒷마당에서 와인을 마시는데, 그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새우 칵테일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삶을 즐기며 사는 멋진 분, 품격 있는 노년의 대명사, 앤 할머니가 나의 롤 모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