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대인 요즘 애기들이랑은 달리 노트에 필기하며 공부했던 나는 그 시절 수행평가가 가장 괴로웠다. 휘황찬란한 여고생들의 필기 노트 사이에 흑청홍으로 끝내버린 내 노트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더 큰 문제는 해독이 필요한 글씨 꼬라지. 너는 애가 생긴 건 얌전하게 생겨서(얌전하게 생긴 건 뭔가요. 못생겼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인가요?) 글씨가 이게 뭐냐고 알아보게는 써야 할 거 아니냐는 타박에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 했는데! 그리고 내 눈에는 다 읽히는데!
그래도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고치려는 시도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나름 노력도 해봤다. 친구가 예쁜 글씨체를 출력한 다음에 따라 쓰면 된다고 해서 당시 우리 사이에 핫 했던 오이체, 가지체로 뽑은 문장들로 열심히 연습도 했었다. 마음이 급해지면 금세 엉망이 돼 버리는 통에 나중에는 그냥 생긴 대로 살기로 했지만.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나는 손으로 쓰는 행위를 좋아한다. 꾹꾹 눌러쓴 종이의 빠시락 소리가 좋다. 오랫동안 펜을 잡은 후 저릿한 손가락의 느낌도 좋다. 펜을 고르는 기준도 나름 까다롭다. 일단 촉이 너무 가는 펜은 곤란하다. 정말 종이가 찢어질 만큼 눌러쓰는 터라 바늘로 글씨를 쓰는 기분이 든다. 뭘 잘 흘리고 쏟으니 수성펜도 곤란하다. 유성펜이나 중성펜으로 0.5mm 이상의 굵기. 조건을 만족하는 몇 가지 제품을 업무용 및 공부용으로 쓰고 있는데 이외에 뭔가 '있어 보이는 펜'이 가지고 싶어졌다. 라미 볼펜을 꽤 오래 쓰다 파카 볼펜을 선물로 받은 이후에는 여기 정착했다. 살짝 뭉개지듯 굵은 펜촉은 악필을 가리기에도 용이하고,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볼펜이라 내 주제에 이 정도면 몽블랑이나 다름없지 뭐.
이 펜은 만학도 어머님의 이른바 '졸업 선물'이다. 검정고시를 준비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대단하시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쩜 그렇게 열심이신지 결석 한 번 없이 나오셔서 앞자리 사수에 사력을 다하신다. 시험이 다가오면 저러다 병날까 걱정될 정도이다. 평생 공부에 한 맺힌 어머님들은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마치 서울대 합격생처럼 기뻐하시며, 강사로서 민망할 정도의 감사를 받게 된다.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몰래 상품권 봉투를 놓고 가시기도 한다. 이 볼펜을 선물하신 어머님도 정말 수업 내내 노력하시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꼭 합격하셨으면 바랐는데 한 번에 합격하셨다는 말을 듣고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고 얼마 후에 감사인사라며 건네신 이 볼펜은 그래서인지 쓸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되는 뭔가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저렇게 열정적이었던 적이 있었나?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