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기 (Survive)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산다는건 무엇인가? 위기의 순간에서 살아 남는다는 뜻의 "survive"가 있고, 생명을 지닌다는 "be alive" 의 뜻이 있다. 어렸을때 특별한 이유없이 달리던 것 말고, 20대가 되고 내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 가장 첫 이유는 to survive 였다. 나는 19살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1년간 열심히 준비해 입학한 디자인 칼리지에서 휘몰아치는 한 학기를 보내고 나는 바로 휴학을 했다.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내 삶을 옮기게 된지 2년차가 되던 시기, 이민자로서의 적응기가 어느새 지나고 벌써 익숙해져버리고 안주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어느 선생의 말이 불현듯 내 마음속에 피어올라 버렸다. 하지만 내 계획을 말했을 때 주위 반응은 “아이고, 여자애가, 위험해, 가지마” 였다. 이는 오히려 오기있는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인걸. 위험한 곳만 가지 않고 바보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걸 보여줄테야.’
유럽에서 여행할 때 주의해야할 것들을 유튜브를 뒤져가며 전부 모아봤다. 그리고 가장 흔한 위험요소는 소매치기라는걸 알게되었다. 홀로 여행중 소매치기를 당하는 상상을 해봤다. 소매치기범은 이 몹쓸짓을 하기 위해 이미 여러번의 연습으로 단련이 되어있을 테고, 나홀로 그를 직면하는거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내가 어떻게 그를 혼쭐은 못내지만 체력을 길러 달리기만 이라도 잘 하면 위험한 상황에서 도망은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났다. 중학교 체육시간 이외나 떠나려는 버스를 잡기위해 달리던 것 이외에는 전혀 필요가 없던 달리기. 이제서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 날 부로 나는 집 앞 골목에서 나홀로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내 뒤를 쫓는 누군가를 상상하며 생존을 위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여행은 어땠는데?”
나름대로 철저한 사전조사와 준비를 했지만은 사실 이 여행은 glamorous 보다는 hustle에 가까웠다. “여행”보다도 “여정”이었다고 말하는게 더 어울리겠다. 첫날 도착한 독일에서는 기차역을 놓쳐 별안간 이상한곳에 내리게 되었다. 예산에 맞춰 가장 싼 옵션으로 구했던 울름에서의 에어비엔비 숙소는 거의 교도소 맞먹는 작은 크기의 많이 열악한 공간이었다. 거친 올드타운 돌밭길에서는 캐리어 바퀴가 끼어 남은 바퀴 3개로 다음 도시까지 끌고가야 했다. 저녁으로 먹은 햄버거에 탈이나 기차에서 속을 뒤엎기도 했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눈앞에서 놓쳐 공항에서 서러운 하루를 보냈다. 실수 많고 눈물겨운 사건들을 나열 하자면 더 할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은 따로있었다. 스위스에 도착한 새벽이 새고 이튿날 아침, 호스텔 사람들 말에 의하면 내가 오기 전까지 이곳에서는 줄곧 비가 쏟아졌단다. 고맙게도 내가 도착한 날에 하늘은 나를 반기듯 다시 맑게 개었다. 그 속에서 철도를 쭉 타고 융프라우요흐에 올라 하얗게 눈 덮인 산길 위에 도착했다. 그곳을 나 홀로 걸을 때 멀리서 이방인들의 말소리만 희미하게 들렸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광활한 자연 경관의 고즈넉함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독립된 자유함을 느꼈다. 이는 그 이전의 고생들을 날려버릴 만큼 가슴이 뻥 뚫리는 순간이었다. 나를 가두려는 틀 안에서 벗어나 홀로 놓여 어쩌면 내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던 이 여정은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깊은 대화였고, 이날 느낀 자유함은 패기있던 나를 향한 격려,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에 대한 위로였다.
약 3주간의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나는, 세상은 참 넓고 나를 보편적인 생각들 속에 가두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게, 또 하고싶은게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향한 고정관념 그런것도 이제는 더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다. 굳이 나를 다른 이들에게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외부의 목소리들은 나를 대변하는 전부가 아니니까. 그리고 내 눈앞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하고싶은 일들로 가득하니까.
"이제는 살기 (be alive) 위해 달린다."
그렇게 여름동안 나홀로 유럽 여행을 소매치기 한번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돌아왔다. 다시 새학기로 돌아온 나는, 여행 전 트레이닝 덕에 달리기에 조금은 익숙해져있었다. 많은 과제로 인해 잠 자는 시간도 부족했던 나는 우리과 밖에있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러닝 동아리. 달리기를 딱히 좋아한다고 생각은 안했지만, 다른 과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달리기를 하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산다 (to be alive) 는건 무엇일까? 목표를 향해 앞만보고 가는 것 말고, 가는 것 그 순간, 가는 길 그 한편에서 나는 나보다 더 크고 넓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 그곳에서 공존하는 것. 여행이 끝나고도 계속 달리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그런 의미에서의 살기 위함이었다. 한국에서의 고등학생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살지 않고 그냥 존재한 것만 같았다. 3년간 내 임무는 하나, 목표를 향해 경주하기. 눈을 뜨고 다시 감을 때 까지 나는 이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이 삶에서 주위의 누군가와 공존하는 것은 단연 스트레스고 시간 낭비였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입에 가시가 돋을 만큼 지독한 혼자와의 싸움을 하던 것이 흔한 일상이었다. 나는 기계마냥 돌아가고있었다. 그리고 그 현실의 서러움을 알아버렸다.
미국에서의 삶은 어쩌면 나도 모르던 나의 이상이었다.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내가 아는 이도 없는 낯선 땅이었지만 생존하기위해 부딪치며 살고 보니 이제는 나를 아는 누군가가 아니어도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 주위의 모두가 나에게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어디로 가든 어디론가는 연결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날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삶을 “살 수 있어” 감사하다고. 나는 그 연결된 삶을 멈추고싶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참여한 첫 달리기 모임 날,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모임 장소에 나왔다. 출발 지점인 스타디움 주차장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나타났다. 학과 불문, 남녀 불문, 달리기 경력 불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동아리 리더는 처음 어색하게 모인 새로운 얼굴들을 호기롭게 반겨주었다. 자기소개와 스트레칭을 같이 한 후 우리는 다 같이 출발했다. “속도가 빠르던, 초보자던 상관없어. 자기의 페이스에 맞게 뛰면 돼” 우리는 리더를 따라 스타디움 한바퀴, 정확히 5키로, 30분 남짓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기본 체력에 나름 자부심이 있었던 나였지만 반쯤 돌고 오르막을 마주쳤을 때는 도저히 뛸 수가 없어 걸었다. 리더는 맨 뒤에서 뒤쳐지는 애들에게 응원의 말을 심어 주며 페이스 메이커로서 우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자기 실력에 맞는 친구들끼리 뛰고싶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초짜들을 챙겨주고 밀어주는 모습이 감동이었다. 그렇게 격려를 받으며 끝까지 달려 나의 첫 5키로를 완주했다.
주차장 가로등 오렌지 불빛 아래에서 모두가 웃으며 들어오는 한명 한명을 환호해 주었다. 이미 어두워진 밤 하늘 아래 선선해진 공기는 나의 뜨거운 얼굴을 식혀주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달려야 했던 힘든 길이었지만 우리는 같이 발맞추고 대화를 나누며 그 길을 함께 완주했다.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숨을 고르며 느꼈다. 이제는 내가 살아있음을.